여우처럼 지혜롭게 살아가볼 일이다.
오래전 직장에서 경험했던 악몽 같은 이야기를 하고 싶다. 그 당시 나는 법인체를 5년 동안 운영하다 동업했던 친구와의 트러블로 관계가 틀어진 후 다시 직장으로 돌아가야 했다. 사업체를 꾸려가면서 누렸던 자유는 직장으로 복귀하면서 물거품처럼 사라졌는데, 좌절감을 짊어지고 출근했던 음울한 아침의 기운을 또렷이 기억한다.
첫 출근부터 버라이어티했다. 그 회사는 개발자를 위한 기반 시설이 너무나 취약했다. 아니 그냥 책상과 구식의 컴퓨터, 모니터 한 대가 전부였다. 개발자에게 듀얼 모니터를 제공하지 않는 다는 발상부터 경악스러웠다. 개인별 독립성을 보장할 파티션조차 없었고 연구소도 명패만 있을 뿐 별도의 공간 없이 영업팀과 자리를 공유하는 형태였다. 이 회사가 과거에 그토록 잘 나간다고 소문이 무성하던 회사가 맞는지, 상장까지 도전했던 곳이 맞는지 의심스러웠다.
사장과 입사 전부터 교류가 있었다. 일거리를 받아서 외주로 개발을 해주곤 했는데, 그것이 인연이 되어서 사업 실패 후, 회사에 입성하게 된 것이었다. 입사하기 전과 후의 사장의 얼굴과 태도는 180도 달라졌다. 그 회사는 모든 결정을 사장이 주도하고 있었는데, 민주적이지 않다고 생각했다. 독단적인 사장의 결정에 의존하는 회사, 아무 말없이 따르기만 하는 직원들의 태도가 좀 위험해 보였다. 사업에 실패하고 다시 회사에 복귀한 후였기 때문에 찬 밥과 더운 밥을 가릴 처지가 아니었다. 당시에는 그냥 불러주는 거 자체가 고마운 일이라 복잡한 생각을 하지 않았다.
일을 하면서 위기는 현실이 되었다. 시끄럽게 울려대는 벨 소리, 영업팀이 고객 응대하는 목소리에 노이로제가 걸릴 지경이었다. 업무에 제대로 집중이 될 리가 없었다. 개발자에게 가장 중요한 것은 조용한 근무 환경인데, 이 회사는 첫날의 분위기부터 그것과는 거리가 멀었다. 퇴사하고 다른 직장을 알아봐야 할 것인가 심각한 고민을 시작했다. 대표와의 인연을 무시할 수 없어 그냥 참아보기로 했는데 그게 훗날 파국의 원인이 될 줄은 몰랐다.
6개월 동안은 대표 얼굴 보기도 힘들었고, 섬에 방치되다시피 했다. 그래도 맡은 일은 그럭저럭 해냈고 분위기에도 적응하며 시간도 흘러갔다. 스스로 소음을 차단한채(헤드폰) 고독을 만끽하며 홀로 일을 처리했다. 그 기간 동안 사장은 회사에 거의 출근하지 않았고, 두문불출하며 내 일에도 관심을 두지 않았다. 요구 사항도 없는 프로젝트를 혼자 기획하고 명세서를 만들며 개발해야 했다.
6개월 후 대표는 본격적으로 일을 해야겠다며 회사에 출근을 시작했다. 대표의 첫마디가 걸작이었다. 프로젝트의 마무리를 위해서 강원도에 위치한 회사의 콘도에서 마무리 작업을 하면 어떻겠냐는 제안이었다. 지겨운 사무실에서 벗어나는 일이라면 그 무엇이든지 다 오케이였다. 어쩌면 한적하고 공기 좋은 곳에서 개발하면 업무에 더 몰입이 될지도 모른다는 생각도 했다. 유배 생활은 그렇게 시작되었다.
내가 생각하는 그림은 강원도의 끝자락, 푸른 바다 앞에서 쾌적한 공기를 마시며 한가롭게 프로그램을 개발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그 바람은 처절하게 짌밟혔다. 새벽에 기상하여 밤 10시까지 코딩만 하는 지독한 반복으로 일상은 이어졌다.
마지막 집중이라는 구실로 생활 반경은 콘도 100미터 이내로 구속 및 억압당했고, 전화조차 하지 못하는 상황이 되었다. 페어 프로그래밍이라는 구실로 대표는 내 옆에 앉아서 실력을 테스트하기도 했고 자신이 개발한 독자적인 알고리즘을 자랑하기도 했다. 가슴이 옥죄는 생활은 계속되었다. 감옥과 같은 콘도에서의 삶은 10일 이상 지속되었다. 심지어는 주말도 없이 말이다.
콘도의 단체 손님으로 인하여 불가피하게 10일 만에 탈출하게 되었지만 장소는 양평 근처의 펜션으로 바뀌어 계속되었다. 매주 월요일 아침마다 '출장 다녀올게'라는 말과 함께 짐을 싸야만 했고 나와 아내는 주말부부 신세가 되었다. 그 시절엔 그것이 정답인 줄 알았고, 다른 선택권은 없을 것이라 생각했다. 그냥 버티는 수밖에 다른 방도는 없다고 생각했다.
악몽과 같은 합숙 생활은 콘도에서 양평 펜션을 거쳐 관악산 근처의 아파트까지 약 2년간 지속되었고 대표의 기인과 같은 행태는 계속되었다. 그 기간 동안 신규로 입사한 개발자들에게 페어 프로그래밍을 통한 무한 테스트가 이어졌고, 숙소에서는 야근과 철야가 반강제적으로 이어졌다. 토요일에 집에 가겠다고 하니 못마땅해하는 사장의 굳은 얼굴 앞에서 내 표정은 무너졌다. 사장의 지시에 대한 무조건적인 이행이 강요되었고, 몸과 마음은 점점 병들어갔다. 지금 생각해도 그걸 어떻게 버텨내었는지 신기하기만 하다.
지금은 웃으면서 말할 수 있지만, 과거에는 지옥인 줄 알면서도 그곳을 탈출할 수 없는 쇠사슬이 내 몸에 묶여져 있었다. 약 2년 정도 시간이 지났을 때, 대표가 인센티브를 쥐여주며 이런 말을 했다. "다른 개발자들을 데리고 같은 과정을 반복하며 내가 숱하게 일을 시키고 괴롭히기도 했지만 버티어낸 건 너밖에 없다"라고 대견하다고 말했다. 내가 대견한 일을 한 건지 멍청하게 참기만 한 건지 알 수가 없었다. 돈 몇 푼에 만족하고 다시 열심히 일하겠다고 고개를 숙인 내가 나중에 참 미웠다. 나는 참을 인이라는 몹쓸병에 걸려있던 것이다.
개발을 하며 온갖 야생의 삶을 다 겪으며 살았다. 그 대표와 산전수전을 겪으며 실력이 향상된 부분에 대해서는 고마운 면도 있다. 하지만 몸과 마음이 상한 건 어느 곳에서도 보상받을 수 없다. 여기저기 유랑 생활을 하면서 가족과의 시간은 그만큼 사라졌다. 잃은 시간들은 어딘가에 산처럼 쌓였을 것이다.
어떤 삶이 정답일까. 오직 일이 전부라 강요하는 부당함 속에서도 나는 뛰쳐나가지도 못했고, 묵묵히 받아들이기만 했다. 한 번만이라도 꿈틀해야 했다. 그렇게 하지 못했다. 앞으로도 그렇게 살아야 할까. 두 번 다시 그런 선택은 하지 않겠지만, 예상치 못한 고비는 다른 형태로 올 것이다. 여우처럼 지혜롭게 살아가볼 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