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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공대생의 심야서재 Aug 31. 2018

'주연'인 당신을 '조연'이라 폄하하는 우를 범하다

당신은 당신을 넘어선다. 

당신은 ‘인생이라는 무대’에서 주연인가? 혹은 조연인가? 


 다른 말로 다시 한 번 묻는다. 성공한 사람, 즉 주연이 설계한 인생을 따라 하려는 당신은 현재 조연에 머물러 있지만 언젠가 주연이 될 것이라는 믿음이 있는가? 그들의 습관을 모방하다 보면 당신에게도 주연이라는 운이 하늘에서 뚝 떨어질 것이라 믿어 의심치 않는가? 애석하게도 말이다, 당신과 나에게 그런 행운이 찾아올 확률은 극히 미미하다. 우리 대부분은 조연으로 살다 죽을 확률이 훨씬 높다.


 ‘주연’이라는 단어는 임금 주主와 펼 연演 자를 쓴다. 주연은 임금의 자리처럼 ‘중요한 역할을 행한다는 것’을 뜻한다. ‘조연’이라는 단어는 도울 조助와 펼 연演 자를 쓴다. 조연은 주연을 돕는 역할이다. 주연이 멋진 연기를 펼칠 수 있도록 보이지 않는 곳에서 주연을 떠받치는 역할이 조연이다. 자기계발 서적에 포장된 성공한 사람의 멋진 말들은 대부분 주연의 말을 옮긴 것이다. 당신을 아무리 그곳에 끼워 맞추려 한다고 한들 타인의 경험은 당신의 이야기가 될 수 없다. 타인의 성공은 그 사람에게 맞도록 맞춤 설계된 것이다. 운 좋게 그 사람에게 성공이란 것이 주어진 것뿐이지, 그의 경험을 조명하거나 그의 인생을 답습한다고 해서 내 것이 될 수 없는 이유다. 하지만 세상은 우리에게 주연이 될 수 있을 것처럼 광고한다. 노력하면 주연이 될 수 있다고 당신에게도 그런 기회가 주어질 것이라고 사탕발림을 이야기한다. 하지만 그런 달콤한 말은 소수의 사람들이 인류를 지배하기 위하여 만든 논리이다. 우리는 그 거짓에 속아서 주연이라는 헛된 꿈을 좇을 뿐이다. 



 켄 로치 감독의 영화 <나, 다니엘 블레이크>에서 다니엘 블레이크는 나이 들고 가난하며 아프다는 이유만으로 사회에서 소외당한다. 단지 가진 것 없고 병들고 늙은 서민이라는 이유로 부당한 취급을 당한다. 아무도 그가 겪었던 억울함에 대하여 들으려 하지 않는다. 낙오한 사람의 재활을 도울 복지 시스템조차 시스템을 위해 존재할 뿐이다. 블레이크는 사회에서 조연만도 못한 밑바닥 인생 취급을 당하지만 ‘자신의 인생에서 만큼은 주연’이라는 주체성과 인간으로서의 존엄성은 흔들리지 않는다. 당당하게 저항하며 자신의 말을 하며 말이다.


 인간이 낼 수 있는 한계는 어디까지일까? 우리는 자신의 성능을 시험하며 사는데 삶이 바로 그 시험 무대이다. 운을 찾아 바삐 뛰어다닌 시절이 있었다. 겁 없이 성공을 찾겠다고, 주연이 되어보겠다고 불구덩이에 뛰어들었으나, 그 녀석이 마음 한가운데로 들어오지는 않았다. 무엇이든 잡겠다고 용기도 내봤다. 노력하면 반드시 보답이 어떤 형태로든 찾아올 거라는 믿음도 있었는데, 그 이유로 신을 찾은 날도 있었다. 진심으로 기도를 한다면 이루어질 것이라 막연한 생각을 했었다. 


 어느 날, 니체의 ‘신은 죽었다’와 같은 충격적인 문장을 접하고 허무주의에 빠지기도 했다. 일상은 그런 마음조차 사치에 불과하다며 정신을 번쩍 뜨게 했지만. 신이 없다고 가정한다면 답은 몇 가지로 결정이 된다. 삶을 포기해버리거나, 적극적으로 살아갈 다른 방법을 모색하거나. 그 무엇도 아니라면 아무것도 하지 않은 채 삶을 흘려버리는 거다. 인간은 원래 게으른 천성을 가지고 있는 걸까. 하지만, 스스로 정신을 차려야 내 가족이든 친구든 위로라도 전할 수 있다. 자신도 돌보지 못하는데 그 누구를 챙길 수 있을까? 



 우리는 각자의 삶에서 주연으로 산다. 다른 사람에게 의지하거나 본질에서 도망 치려하지 말고 삶을 주체적으로 이끌어야 한다. 다른 사람이 정한 규칙대로 따르려만 하지 말고 관습처럼 굳어진 생각, 이론, 진리, 질서를 타파해야 한다. 안일한 생각을 버리고 스스로의 선택을 믿어야 한다. 그것이 니체가 말하는 초인Übermensch의 개념이다. 이진우 교수의 ≪니체의 인생 강의≫에서는 초인을 다음과 같이 정의한다.     



 "형이상학적 가치, 천상의 가치를 부정함으로써 새로운 가치를 만들어낼 능력을 가진 자가 초인이에요."



 초인은 주연이 만든 질서를 의심한다. 모두가 사실이라고 정의하는 보편적인 현상조차 부정한다. 사실을 부정함으로써 초인은 자신에게 맞는 새로운 질서를 창조한다. 우리는 모두 초인이 될 수 있다. 초인은 스스로를 뛰어넘으며 위험 앞에서도 비굴하게 도망가지 않는다. 지성과 지혜를 동시에 겸비한 초인은 평범한 인간과 차별을 둔다. 무엇이든 뛰어넘고 한자리에 머무르려 하지 않는 초인, 우리에게 주어진 삶이 무한하지 않기에 지금 이 순간, 현재에 안주하려는 자신을 뛰어넘어야 한다. 인류라는 커다란 무대에서 조연이 아닌 당신의 인생에서 주연으로 말이다. 



 나는 글을 쓰면서 피로와 고통을 맛보고 있지만 결코 포기하지는 않았다. 글쓰기는 자신을 위로하는 방법이며 남들에게까지 위로를 안길 수 있는 수단이다. 작심삼일이라 할지라도 자신을 믿어야 한다. 결심과 나태, 작심과 게으름이 반복되었다. 그런 날이 쌓이고 쌓여 몇 년이 흘렀다. 재료가 없으니 ‘나’로부터 이야기를 시작했다. 쓰기 시작하고 그것이 습관이 되자, 삶 자체가 글이 되었다. 무차별적으로 실천을 하자, 어느 순간 특이점이 찾아왔다. ‘나’라는 한계에서 벗어나 세상을 바라보는 관점이 생기기 시작한 것이다. 창작은 고통을 낳기도 했지만 내면을 주연으로 이끌었다. 


 우리는 여전히 질척한 일상을 보내고 있다. 직장의 실적이든 학교에서의 성적이든 아내, 남편으로서의 역할이든, 자신을 뛰어넘어야 하는 과제는 여전하다. 같이 가야 하는 사람을 붙잡고 가야 할 숙제도 있다. 인간은 각각 인생이라는 독립 무대에서 주연을 맡는다. 수없이 반복하고 노력해도 습관으로 굳어지는 길은 쉽지 않다. 몇 년 동안 자신과 집요하게 싸움을 해야 한다. 내 인생의 조연이 아닌, 타인과 비교를 통하여 얻는 주연도 아닌 스스로를 위한, 자신의 영역에서 찾는 주연을 향해 말이다. 우리는 모두 고유의 영역에서 주연이라는 사실을 잊지 않기 바란다. 당신이라는 무대에서 초인, 즉 주인공으로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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