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공대생의 심야서재 Aug 24. 2018

타인에 시선이 머무를 때 '우월'과 '열등'이 탄생한다

열등감은 인간의 인격을 쉽게 왜곡한다.

 ‘우월’이란 ‘다른 것 또는 사람보다 나음’을 의미한다. 한자로는 넉넉할 우優와 넘을 월越을 쓴다. 누군가와 높이를 두고 경쟁을 펼치다 그 사람을 넉넉하게 넘긴다, 즉 경쟁에서 우위를 점한다는 뜻이다. 그런 생각은 결국 타인을 자신의 밑에 둔다는 선민의식에서 출발한다. 이러한 경쟁에서 패배한 사람은 스스로를 열등하다고 여긴다. ‘열등’이란 ‘특정한 수준이나 등급보다 낮음’을 의미한다. 우월과 열등은 서로 반대편에 서있다. 스스로를 무가치하게 여기는 마음이 바로 열등이다. 세상을 살아가다 보면 자신도 모르게 우월과 열등으로 편을 가른다. 물론 열등한 위치보다는 우월한 위치에 서고 싶은 것이 사람의 마음이다.  



 어느 날 아내가 중부 시장에서 사온 견과류(땅콩, 아몬드, 호두 등)를 정리하고 있었다. 아내는 좋은 것을 골라 선물해줄 사람이 있다고 말했다. 옷을 갈아입고 아내가 정리하는 풍경을 가만히 들여다보다 도와주기 시작했다. 아내는 땅콩 중에서도 모양이 예쁜 것과 찌그러진 것, 알이 굵고 튼실한 것과 그렇지 않은 부류를 따로 분류했다. 열성의 유전자를 가진 견과류가 완전히 버려지지는 않겠지만 어쨌든 선호도 측면에서 한 단계 밀렸다는 얘기이다. 정리를 도와주면서 아내의 선택 과정이 인간의 외모 지상주의와 닮아 있다는 느낌을 지울 수 없었다.


 인간은 생물학적으로 뛰어난 외모에 끌리게끔 진화했다. 잘생기고 예쁜 외모에 집착하는 것은 우리의 의도보다는 오랜 역사에 걸쳐서 그렇게 되도록 유전자 지도에 각인된 증거일 뿐이다. 자손을 번식시키기 위해는 우월한 유전자가 선택받을 확률이 높다고 한다. 


 아내에게 나는 우월한 유전자냐고 물어보았다. 음, 아내는 역시 대답이 없었다. 문명이 발전함에 따라 인간의 본능도 지적인 흐름으로 진화하고 있다. 생존으로서의 욕구는 언젠가 멈춰버릴지도 모른다. 진화라는 것은 생존하기 위해 환경에 적응하는 과정인데, 약한 자는 자연적으로 도태될 수밖에 없다. 물론, 인간의 세계에서는 약한 자도 선택을 받을 수 있는 다른 길이 있어서 다행이다. 그래서 나와 같은 열성 유전자도 선택을 받을 수 있었다. 가령 남자의 경우는 사냥에 필요한 기술이나 강인한 근육이 발달하지 않아도 살아남을 수 있다는 것이다. 낮에는 프로그래밍을 하고 밤에는 글을 쓰며 먹고사는 신체적으로 열등한 인간에게 참으로 희소식이 아닐 수 없다. 


 인류가 문명을 지적으로 발전시킬수록 더 이상 생존의 문제는 중요한 가치가 아닐 수 있다. 머지않은 미래에는 과학기술의 발전으로 영원한 생명을 얻는 시대가 온다고 하니, 나와 같은 열성의 유전자에게도 유전자를 후대에 남길 수 있는 기회가 온 것이다. 가령, 내 머릿속의 세상이 서버에 업로드 되어 가상현실에서는 더 멋진 유전자를 가진 남자의 몸으로 다시 태어날지도 모르는 일 아닌가. 가상현실과 실제 세상을 구별할 수 없는 기술이 눈앞에서 실제 구현되고 있으며 일반인이 쉽게 쓸 수 있는 세상도 머지않았다. 인간이 연구 중인 과학 기술력은 생존의 문제를 완벽하게 극복할 수 있으리라 기대한다. 


 인간의 외모가 짝짓기에 유리하고 후손을 남기기 위해 유리한 요소라면, 열등한 유전자는 자손을 남기지 못하고 도태되어야 정상이다. 수려한 외모를 가진 사람만 살아남아야 정상인데 실상은 그렇지 않다. 인간에겐 동물이 없는 인격이란 것이 존재하고 이성적으로 사고할 수 있는 능력이 있다. 문명사회에서 선택받는 기준이 외모보다는 훨씬 다양하고 복잡한 양상을 보인다는 얘기다. 물론 과학 기술이 아무리 발전하여도 우월과 열등에서 벗어나기는 힘들다. 그런 감정은 여전히 인간과 인간을 또 다른 대립으로 몰고 간다. 그렇다면 우리는 우월한 존재인가? 열등한 존재인가? 아니면 중간자적인 위치인가? 



 이진우의 ≪니체의 인생 강의≫에서는 우월한 감정을 강자와 약자로 설명한다. 우리는 삶을 자신의 의지대로 살아갈 수 있는 자유를 가지고 있다. 그 자유는 바로 ‘권력에의 의지’를 설명한다. 이 세상은 약자와 강자 두 가지의 집단으로 분류가 된다. 강자는 주인 도덕, 약자는 노예 도덕이라는 유형으로 분류가 된다고 니체는 설명한다. 강자라 할 수 있는 그들은 자신이 약자에 비해서 우월하다는 쾌감을 느꼈으며, 자신들의 지위를 유지하기 위해 그들만의 질서를 만들었다. 그러나 약자들은 억압받고, 늘 고통을 받는다. 그들은 주인을 전복시키기 위하여 온갖 궁리를 하지만, 주인은 너무나 강력해서 아무것도 넘볼 수 없다는 무력감만 느낀다. 그들은 결국 정신적으로 반란을 꾀할 수밖에 없었는데 이러한 감정을 ‘원한 감정’이라고 한다. 약자는 자신의 열등한 위치를 인정받기 위하여 다음과 같은 말을 생산했다.     



“네 이웃을 사랑하라.” 

“부자가 천국에 들어가는 것은 낙타가 바늘구멍에 들어가기보다 어렵다.”     


무력한 사람들이 자기 자신의 약한 처지와 무능력으로부터 나오는 가치를 우월한 가치로 포장하고 위장함으로써 살아남고자 하는 계략을 ‘무능의 간계’라고 말합니다.      


- 이진우 ≪니체의 인생 강의≫ 중에서     



 자신이 무능력하기에 그것을 감추기 위하여 우월한 것처럼 포장한다는 뜻이다. 하지만 그런 위선이 오래갈 수 있을까? 겉으로 보이는 모습이 언제까지 유지될 것이라고 생각하는가? 불안할 것이다. 불안한 마음은 열등을 더욱 키울 것이다. 


 심리학자 아들러는 열등이라는 감정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설명했다. 인간은 과거의 원인을 통하여 현재의 나의 상태를 설명하는 것이 아니라, 현재의 목적을 변명하고 이루기 위하여 과거의 원인을 스스로 만들어낸다는 것이다. 인간은 누구나 열등감을 가지고 있다. 그 열등감을 현재의 무기력하거나 행동해야 할 마음의 병과 같은 우울증의 상태를 벗어나기 위하여 긍정적인 초월 또는 우월감으로 극복해야 한다.


 열등감은 인간의 인격을 쉽게 왜곡한다. 감정을 파괴하며, 우울함이나 상실감으로 빠져들도록 유혹한다. 열등감 속에 빠져서 허우적대고 변명이나 하고 있어야 할까? 아니면 그것을 극복할 수 있는 방법을 연구하고, 새로운 에너지를 통해서 열등감을 긍정적인 면으로 승화시켜야 할까? 선택은 개인에게 달려 있지만, 인간은 발전하고 성취하고자 하는 목적이 있기 때문에 누구나 과거의 원인론, 즉 열등의식에서 벗어날 수 있다고 믿었다.



 아들러의 이론이 우리 사회에서 조명을 받았던 것은, 그만큼 우리가 고민하고 있는 “지금 행복한가?”라는 질문에 근거하고 있다. 타인과 비교해서 자신의 처지를 비관하거나 열등해하는 마음은 자기 스스로가 만들어낸 주관적인 감정이기에 스스로 충분히 극복하고 초월할 수 있다고 주장한다.


 호모 사피엔스는 우월이나 열등의 감정을 느끼는 것조차 사치였다. 그들은 생명의 위협과 맞서 싸워야 했기 때문에 살아야 한다는 본능 외에 다른 감정은 느낄 수 없었다. 현대인에게는 살아남기 위한 고민을 하지 않아도 생명이나 생식 기능을 잃을 걱정이 없게 되었다. 그만큼 풍요로운 세상이 되었다는 얘기가 아닐까? 삶은 비교적 안정되었지만 경쟁이 시작되면서 우리는 우월과 열등의 감정을 알게 되었다. 아내는 울퉁불퉁한 땅콩을 한쪽에 계속 올려놓았다. 나는 그 열등한 땅콩을 하나 집어 들어 껍질을 벗겨보았다. 쉽게 벗겨지지 않아 짜증이 좀 났다. 못생긴 게 고집도 세다고 녀석에게 핀잔을 줬다. 하지만, 보기에는 좋지 않게 생겨도 맛은 괜찮다며 먹어보라며 아내는 내 입에 땅콩 한 개를 넣어줬다. 음… 맛은 언급하지 않겠다. 대신 나는 우월해 보이는 녀석을 하나 골랐다. 역시 맛이 참 좋았다.

이전 03화 나를 믿지 못하면, 나의 삶이 ‘열등감’을 믿는다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