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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공대생의 심야서재 Nov 20. 2018

스쳐 지나가는 단상들 #8

머리 쓰는 일은 이제 그만

고객사에서 따끈따끈한 캐드 도면이 도착했다. 이 녀석을 어떻게 요리해주어야 하는지 감이 오지 않아 의자를 돌려 앉았다. 눈을 감고 생각하려니 반갑지 않은 잠이란 녀석이 대신 등을 두드렸다. 디자인 팀에게 넘겨 버릴까, 직접 건드려볼까 우왕좌왕했다. 그래 갈팡질팡 병이 또 도졌구나.  


우여곡절 끝에 도면을 열긴 했다. 작년에 구입한 캐드 컴포넌트 덕분에 간신히 파일을 열었으나 내 힘으로 할 것이 없었다. 아니, 이건 대체 뭐여. 파일 하나에 지하 4층부터 지상 15층까지 일렬횡대로 줄을 서고 있는 게 아닌가? 무슨 군대 열병식이라도 하나? 연대장처럼 고함이라도 치고 싶었다. 그런 방법이 파일을 자동으로 분류라도 할 수 있다면. 


줄지어 선 농게 같은 녀석들의 다리를 분리해내려면 10시간은 엉덩이에 진물이 날 정도로 책상 앞에 앉아있어야 하겠더라. 게다가 필요 없는 레이어들을 덜어내야 하니. 이 무슨 개발자에게 막노동이란 말인가? 멘탈이 나갈 무렵 같잖은 아이디어 하나가 후두부를 강타했다. 그래, 제거가 필요한 레이어 종류와 이름을 분석하면 불러들일 때 자동으로 녀석들을 황천길로 보낼 수 있지 않을까?라는 어리석고도 얍삽한 생각이었다. 


그래, 머리가 조금 더 고생하는 편이 나았다. 머리가 편하면 손가락과 눈이 생고생한다. 10시간 투자하는 것보다는 1시간만 머리가 희생하면 몸이 휴식이라도 취하지 않겠나. 허나, 몸이 석연찮은 소리를 하는 것 같았다. 자신은 아직 건재하다고 막일이라도 노동할 기회를 달라고 항변하는 것 같았다. 종일 머리만 썼으니 오늘은 몸에게 맡겨달라고 까짓 거 10시간 이면 어떠냐고, 자신에게 임무를 위임하고 정신은 잠시 외근이라도 다녀오라고 말했다. 


가끔은 수고스럽더라도 머리 쓰는 일은 중단하고 싶다. 머리가 닳아서 사유의 변주가 정지하면 어쩐단 말인가? 그래, 몸으로 버텨보는 거다. 몸의 언어로 살아보는 거다. 메일함을 열었다. 그리고 디자인 팀에게 긴급 타전을 했다. 내일까지 도면을 층별로 분리하여 전송하라고. 아주 긴급한 거라고 볼드체로. 역시 일은 남에게 시켜야 제맛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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