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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공대생의 심야서재 May 05. 2019

나는 소프트웨어형 인간이다.

태생부터 약골

군 제대 후, 빈둥빈둥거리며 하루를 보내던 나는 일당을 꽤 높게 쳐준다는 알바 소식지를 보게 되었다. 살집이 꽤 불었으나, 몸을 쓰는 일이라는 정보에 살도 빼고 돈도 벌 수 있다는 기대에 부풀었다. 하지만 출근 첫날부터 조짐이 썩 좋지 않았다. 엉뚱한 역에서 내리는 바람에 한 정거장을 걸어서 되돌아가야 했고, 잘못된 출구로 나가는 바람에 계단을 오르락내리락해야 했다. 게다가 번지수로 건물을 찾는다는 게 여간 어려운 일이 아니어서 주변 건물 관리하는 아저씨들을 꽤나 귀찮게 해야 했다. 


그때는(25년 전) 번지수와 건물명 하나만으로 목적지를 찾아야 했다. 지금처럼 스마트 폰 앱 하나만 있으면 위치추적까지 덤으로 해주는 GPS 시스템은 존재하지 않았다는 얘기다. 귀신처럼 한 방에 목적지를 찾아냈으면 좋았으련만, 땀띠가 등짝을 침범하고 나서야 겨우 발견하고 말았다. 아무튼 찾아낸 말썽 많은 회사는 건물 1층 화장실과 나란히 서 있었다. 아니 사무실이라고 부르는 것 자체가 볼품없을 만큼 책상 하나만이 단출하게 모셔져 있다고 할까. 책상 앞에는 사장이라고 위세라도 부리고 싶은 사람이 넥타이를 반쯤 풀고 앉아 담배를 꼬나물고 있었는데, 그 하얀 와이셔츠의 남자는 내 몸뚱이를 한 번 스캔하더니 "힘 좀 쓸 줄 알아?"라고 다짜고짜 심문부터 하는 것이었다. 물론 그렇지 않다고 말하면 1분 만에 쫓겨나는 신세가 될 것 같아 대충 얼버무렸지만.


그 알바는 대용량 서버나 네트워크 장비를 글로벌 기업에 납품하는 무게감 있는 일이었다. 장비란 것이 보통 0.1톤이 넘었다. 나를 비롯한 장정 대여섯 명이 들러붙어 날라야 했는데, 하필이면 엘리베이터가 없는 재래식 건물이 대부분이라는 게 문제였다. 군대에서 무거운 짐을 나를 때처럼, 물건을 드는 척 요령을 피운다는 건 소용이 없었다. 그곳은 척하는 게 통하지 않는 노동의 세계였다. 오전을 겨우 때운 후, 오후에는 청천벽력 같은 소리를 들었다. 그것은 그랜드 피아노를 1층부터 7층까지 운반해야 한다는 소식이었다. 나는 계약서를 들이밀고 애초에 그런 약속은 없었다고 항변하고 싶었지만, 계약서 따위는 존재하지도 않았으니 난 입을 다물어야 했다. 계단으로 피아노를 나르는데 성인 남자 6명이 붙어도 답이 나오지 않았다. 힘쓰지 못하는 나무늘보와 같은 내 무브먼트가 시원치 않았는지 사장은 "저 자식 사내놈이 힘도 못 쓰네, 어디서 저런 놈을 데리고 왔어"가고 욕을 해댔다. 



물론 당신의 예상대로 나는 그날 부로 바로 잘렸다. 그리고 뼈저리게 깨달았다. 나란 인간은 절대 힘쓰는 일과는 인연이 없다는 걸. 도련님처럼 고운 손을 가진 사람은 면장갑보다는 키보드와 더 친해져야 한다는 사실을. 


졸업 후 2019년까지 단 한 번도 힘을 써본 일이 없다. 힘을 쓰는 일에 재주도 없으려니와 턱걸이 2개 하고 나가떨어지는 약골이라 막일 판은 한 번도 기웃거리지 않았다고 할까. 무슨 일이든지 자신의 역량을 아는 게 중요하지 않을까. 해낼 수도 없으면서 무작정 덤벼보겠다는 생각은 무모한 거다. 달성 불가능한 도전으로 희열을 얻기도 하지만, 무모한 도전엔 나서지 말라는 아버님의 말씀을 신조로 삼으며 근육남을 경멸하며 살았다. 


다행히 무거운 거 나르지 못한다고 능력 없다는 욕은 안 먹고살았다. 회사에 들어가도 전산실 서버 장비 같은 건 먼지나 잘 털면 되었지, 운반할 걱정은 하지 않아도 됐다. 가끔 주변 사람들에게 동안이라는 칭찬을 듣곤 하는데, 그게 다 힘을 쓰지 않고 산 덕분은 아닐까,라고 생각해본다. 몸보다는 머리를 쓰고 살아야 하는 직업을 가진 게 천만다행이 아닌가. 나 같은 허약 체질도 밥 먹고 살고 있으니.


정신적 스트레스로 잠 못 이루는 날이 많지만, 두 손과 컴퓨터, 장식품 같은 머리 하나만 있어도 사는데 문제없었다. 무엇이든 만들어 내는 재주를 갖춘 나야말로 소프트웨어 그 자체가 아닌가. 20년 동안 프로그래밍이라는 걸 지겹도록 하고 살았다. 좋아해도 돈과 연결이 되니 어느 순간 지겨워지더라. 천직이라고 믿고 살면서도 사람과의 관계가 힘들어, IT 업계에서 떠나고 싶을 때가 한두 번이 아니었다. 슬프면서도 우스웠던 것은 결국 컴퓨터가 아니면 할 게 없었다는 거다. 그 이유가 불혹을 넘긴 지 한참이 되고 나서야 진정 이 일이 내가 하고 싶은 일인지 다시 생각하게 만들었다고 해야 할까? 직장 생활을 한 지 20년이 넘는 세월을 마감하는 시점인 지금, 또 다른 삶을 생각해 본다. 하지만 그 일 역시 힘쓰는 건 안 되겠지. 사람은 자신이 몸 담았던 분야를 쉽게 떠나지 못하나 보다. 프로그래밍에서 손을 놓겠다고 작정하면서도 작가라는 또 다른 무대 역시 컴퓨터 없이는 도전할 수 없는 직업이니 아이러니가 아닌가.


그것이 내 한계인지, 운명인지는 모르겠다. 도전이라는 게 나이를 먹을수록 나도 모르게 안정적인 영역으로 제한되니 말이다. 나이를 먹을수록 생활 반경이 점점 줄어든다는 얘기다. 한편으로 꽤 무섭다. 내일 당장 회사에서 잘려나간다면 세상은 나를 필요로 할까, 걱정이 앞선다. 배운 게 도둑질이라고 키보드와 컴퓨터 없이는 아무것도 못할 거 같은데, 이 짓으로 과연 가족과 행복한 삶을 살 수 있을지. 그 이유는 여전히 나를 비굴한 존재로 전락시킨다. 회사에서 인간다운 대우를 받지 못해도, 상사의 부당한 처사 앞에서도 화를 누르기만 하는 것이다. 견디는 거 하나만으로도 이미 만랩인 셈인데 졸업은 못한다. 법정 스님의 무소유를 매일 읽으면서도 여전히 소유의 사슬에 묶여 있는 나는 어디로 향해야 하는 걸까? 


무소유를 외치고 소로의 <월든>을 읽으면서 간소한 삶을 살아보겠다고 다짐하는 것이 미래의 희망이 되지 않나 기대라도 해본다. 한 편으론 다행이기도 하다. 부양해야 할 사람이 아내뿐이니 말이다. 나에게 자식이 있었다면, 과연 그들을 책임질 그릇이 되었을까?라는 가정을 한다. 지금처럼 키보드로 생각을 풀어낼 재주라도 있어서 참 다행이다. 태생부터 약골인 내게 이런 능력이라도 주신 신에게 감사라도 해야 할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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