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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공대생의 심야서재 Jul 18. 2020

나의 오디오 라이프

지치고 외롭고 슬플 때, 음악이 위로가 된다.

나는 어려서부터 음악 듣는 걸 좋아했다. 국민학교 막 입학한 시절쯤 됐을까? 방학이면 외갓집에서 무위도식을 일삼는 소년으로 살았는데, 소년에게 그리 어울리지 않는 취미생활이 하나 있었으니 그것은 바로 진공관 오디오에 집착하는 일이었다. 아마도 그때부터 나는 듣는 것에 예민한 반응을 키웠던 것 같다. 그런데 그 소리에 집착하는 습관이 먼 훗날 마니아적인 수집 그리고 무리한 지출까지 동반하게 될 줄은 몰랐지만...


외갓집에는 국딩 2학년 생보다 키가 30센티미터나 더 큰 스피커와 진공관 오디오 시스템이 놓여 있었다. 이모는 미국에서 물 건너온 거라며 나 같은 꼬마는 절대 건드리면 안 된다고 강조했다. 그럼에도 나는 직장에 출근한 이모 몰래 그 동그랗고 커다란 다이얼을 요리조리 돌려댔다. 그럴 때마다, 시계 초침 같은 것이 왔다 갔다 하는 것 자체만으로도  신기했다. 오디오는 아이가 접하기 힘든 세상이기만 했다. 조작법을 알리 없는 오디오 꿈나무는 이모나 삼촌이 LP 작동시키는 걸 유심히 훔쳐보다, 어른들이 집을 비웠을 때 그대로 써먹곤 했다. 그때부터 음악에 관한 불씨를 키웠다. 그리고 언젠가 체리 빛깔이 흐르는 오디오를 꼭 갖고야 말겠다고.


막연한 희망은 보잘것없는 현실과 충돌할 뿐이었다. 못 사는 집 아이라는 타이틀이 붙은 나에게 부르주아의 상징인 진공관 오디오가 어디 가당키나 한 일인가? 이모는 내가 불쌍해 보였는지 고3이 되었을 때 퇴역군인처럼 낡았지만 제법 낭창낭창한 소리를 내는 문제의 오디오를 넘겼다. 99점짜리 국어 성적표를 받은 이후로 인생에서 가장 감격스러운 사건을 맞은 셈이었다. 고무된 나머지, 밤과 낮 가릴 것 없이 프레디 머큐리의 Bohemian Rhapsody, 필 콜린스의 Another Day In Paradise, 브라이언 아담스의 Heaven 따위를 들었다. 그때 느꼈다. 음악은 때로 가난까지 잊게 해주는 존재가 된다고. 음악은 장르마다 고유의 향기를 품는다. 그 힘은 가슴의 대화법이라고 할까. 가슴에 쌓인 응어리가 세상 밖으로 배출되는 감격을 느꼈으니, 아리스토텔레스가 말한 카타르시스라고 대입할 수도 있겠다. 나는 공부는 안 하고 매일 스피커 옆에 앉아 LP, 카세트테이프와 대화만 실컷 나눴다.


결혼을 하면서 처음으로 내 집에 꾸민 공간은 리스닝 룸이었다. 리스닝 룸이라고 하니 거창한 것처럼 들리지만 사실 거실 한 귀퉁이에 자그마한 스피커 몇 개를 들여놓은 게 전부였다. 직장에서 스트레스를 한 가득 받아 들고 퇴근하는 날이면 아내와 나는 작은 의자에 앉아 쇼팽의 ‘녹턴’이나 김광석의 ‘사랑했지만’에 의지하곤 했다. 아내는 비교적 음악에 관해서는 잡식인 내 취향을 따라오기 힘들었지만, 말하지 않아도 통하는 그러니까 음악이라는 언어로 정서적인 교감을 나눴다.


나는 호시탐탐 오디오를 바꿈질할 기회를 노렸다. 오디오 애호가들은 음악을 듣는 것도 중요하지만 시스템을 끊임없이 교체하고 싶은 욕망을 멈추지 않는다. 코엑스와 앰배서더 호텔에서 열리는 각종 오디오 쇼에서 데이트를 즐겼고, 멋진 스피커 사진이 박힌 오디오 잡지를 구독했으며, 테크노마트 오디오 매장에 수시로 구경을 다녔다. 


전 방위 작전 구사와 질긴 구애 끝에 아내는 나에게 설득당하고 만다. 2004년 새 집으로 이사하며 방 하나를 온전히 내 취향으로 꾸미는데 약속을 받은 것이다. 설계도를 그리려고 그림판에 마우스로 선을 그려가며 어설픈 디자인을 마쳤다. 서재를 한쪽 벽면에 배치하고 한쪽에는 오디오 스피커를 가운데에는 큼지막한 책상 하나를 놓는 것이었다. 책상의 용도는 글을 쓰기 위한 것이 첫 번째였지만, 아내와 함께 음악 감상할 때 커피나 와인잔을 올려 두기 위한 목적도 컸다.


이사를 마치고 인체 공학 의자도 들였다. 와인 두 잔을 놓고 저무는 노을을 바라보며 에바 케시디의 ‘Songbird’를 들었다. 음악이 우리에게 인생의 두 번째 동반자가 되는 순간이었다. 이왕 듣는다면 원음에 가까운 맑은 소리를 내주는, 감동을 주는, 가슴을 치는, 휴식을 주는 오디오 시스템이 있어야 하지 않겠느냐,라고 세뇌시킨 결과를 맛보았던 것이다. 어쩌면 오디오가 자식을 대신할 수 있지 않겠느냐고 위험한 생각까지 나누며.



프로젝터가 천정을 뚫고 스크린이 벽을 뒤덮으며 인테리어를 망쳤으나 아내는 포기한 듯싶었다. 그깟 벽 한 귀퉁이 사라지는 게 무슨 대수라고 생각했던 모양이었다. 스피커 개수만 10개가 넘어가고, 프로젝터, 스크린, 뱀처럼 구불구불하게 생긴 케이블, 소스가 필요하다고 구입한 수백 장의 DVD 타이틀까지 거실을 오디오 기기들이 지배를 했다. 주말이면 거실 소파에 앉아서 음 분리도를 테스트하려는 남편이 얼마나 철없게 보였을까? 중앙에 배치한 스피커가 좌우 스피커보다 성능이 딸린다고 더 투자가 필요하다는 남편의 입 모양이 얼마나 미웠을까? 8인치 우퍼로는 가슴을 때리는 파워가 부족하다고 10인치로 업그레이드를 해야 한다는 남편의 항변이 얼마나 가소로웠을까?


아이 없어도 스피커가 있으면 삶이 윤택해질 거라는 남편의 허술한 논리가 통하기는 했다. 실제로 그러한지는 더 살아봐야 판단이 가능할 것 같지만 서도. 2004년에 설치한 스피커는 자라서 15살쯤이 됐다. 인간의 나이로 계산하면 어쩌면 중년을 넘어선 걸지도 모르겠다. 우리는 가끔 착각에 빠진다. 지치고 외로울 때, 세상이 두려워질 때 위로를 안기는 오디오가 어쩌면 자식보다 나을지도 모르겠다고.


Queen – Bohemian Rhapsody (Official Video Remastered)

https://www.youtube.com/watch?v=fJ9rUzIMcZQ


Phil Collins - Another Day In Paradise

https://www.youtube.com/watch?v=Qt2mbGP6vFI


Bryan Adams - Heaven

https://www.youtube.com/watch?v=s6TtwR2Dbjg


Eva Cassidy - Songbird

https://www.youtube.com/watch?v=bTNLYeaL7N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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