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인이 된 후로 K와 난 하루가 멀다 하고 만났다.
친구일 때는 몰랐는데, K는 꽤 적극적인 면이 있었다.
조깅의 매력에 흠뻑 빠져있던 나는 건강과 다이어트를 위해 퇴근 후 매일 저녁 안양천을 달리곤 했다.
집에서 찻길 하나만 건너면 안양천 산책길이 나온다.
그날도 퇴근 후 조깅을 하기 위해 화장을 싹 지우고 머리를 질끈 묶고 대충 추리닝 차림으로 길을 건너려는데, 익숙한 자동차가 보인다.
'에이, 설마......'
그런데 차 문을 열고 내리는 것은, 설마 K가 맞았다.
예쁜 모습만 보이고 싶던 연애 초기, 쌩얼에 추리닝 차림으로 마주한 연인이 반가운 한편 퍽 난감했다.
K의 숙소에서 우리 집까지는 차로 한 시간이 훌쩍 넘는 거리였는데, 그렇게 그는 잠시 얼굴을 보기 위해 왔다며, 정말 얼굴을 보고 돌아갔다.
K가 휴가를 낸 날이면, 내가 출근한 사이 마트에 가 장을 봐다가 우리 집 냉장고를 가득 채워두기도 하고, 퇴근시간 맞춰 집에서 맛있는 요리를 해 놓고 기다리기도 했다.
크리스마스를 앞둔 어느 날, 우리 사이를 급 진전시킬 사건이 벌어졌다.
몸이 좀 이상하다 느꼈는데, 우리에게 생각지도 못한 선물이 찾아온 것이었다.
K는 임테기의 두 줄을 보고 두려움에 휩싸인 날 안아주며 한 치의 망설임도 없이 말했다.
"결혼을 좀 더 서둘러야겠네! 난 좋은데, 너도 괜찮아?"
병원에 들러 아이의 존재를 확인하고 주말에 우리 부모님께 인사를 드리러 갔다.
(엄마께 미리 사실을 얘기했더니, 엄마가 내 등짝을 몇 대 날리셨다.)
아빠는 내 남자 친구가 온다는 사실에 무척 기뻐하셨다.
엄마 아빠, K와 나는 소고기를 파는 식당에서 처음 인사를 나누게 되었다.
속이 타는 우리의 마음을 아는지 모르는지, 아빠는 싱글벙글 웃으며 K에게 이런저런 질문을 했고, 무릎을 꿇은 K는 언제 폭탄선언을 해야 하나 기회만 엿보고 있었다.
지글지글 소고기를 뒤집으며 아빠가 물었다.
"그래, 앞으로의 계획은 어떻게 되는가?"
기회는 이 때다 싶었는지, K는 자세를 고쳐 잡고 말했다.
"저, 아버님, 곧 할아버지가 되실 것 같습니다."
"........ 뭐라고?"
기분 좋게 웃으며 고기를 굽던 아빠의 손이 덜덜 떨리고 있었다.
집게를 내려놓고 소주를 한잔 들이키셨다.
한동안 적막이 이어졌다.
"그래, 그래, 그럼 얼른 결혼해야지. 그렇지?, 얘들 나이도 있는데 결혼하면 되지요 여보. 얼른들 먹거라!"
전날 그렇게 나를 구박했던 엄마는 상황을 수습하며, 분위기를 풀어주었다.
다음 날엔 K 부모님을 찾아뵈었다.
K가 미리 전화로 자초지종을 설명드렸다고 했다.
어색하고 긴장되어 어떻게 밥을 먹었는지 모르겠다.
결혼식 날짜는 2월 말로 잡았다. 준비할 시간은 딱 두 달, 시간이 턱없이 부족했기에 결혼 준비로 갈등할 겨를도 없이 우리는 그렇게 부부가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