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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글맛공방 Nov 22. 2020

법의 근본적인 한계를 묻다

영화 〈귀주 이야기〉와 책 〈논어〉

중동 지방에 전해 내려오는 이야기 중에 이런 것이 있다. 어떤 상인이 돈이 무척 필요한데, 돈을 마련할 방법이 집을 파는 길밖에 없었다. 집을 포기하고 싶지 않았던 그는 한가지 꾀를 내었다. 그는 집을 팔되, 방 한칸만은 자신의 소유로 남겨두었다. 그리고 며칠 후부터 자신의 방에다 죽은 고양이들을 갖다 놓기 시작했다. 고양이 시체들이 썩기 시작하고, 냄새가 온 집안에 진동하게 되었다. 도저히 참을 수 없게 된 새로운 집주인은 법정에 이를 고소했다. 그러나 재판관은 상인의 소행이 법에 위배되는 것은 아니라고 판결했다. 집주인은 결국 많은 손해를 보고 상인에게 되팔 수밖에 없었다. 

우리는 살다보면 타인과 다투게 되는 때가 있다. 잘잘못을 가려지지 않을 때, 우리는 법에 호소한다. 법이 나의 인간적인 고초를 해결해줄 수 있으리라 믿기 때문이다. 그러나 현실은 우리의 기대를 배반하기 일쑤다. 비도덕적이지만 법에 걸리지 않는 행위를 통해 소기의 목적을 이룬 상인의 이야기처럼 법이 오히려 비도덕적인 행위의 손을 들어주는 경우도 있다. 

법은 어느 정도까지 인간의 도덕적인 욕구를 채워줄 수 있을까? 진원빈(陳源斌)의 소설 〈만가소송〉(萬家訴訟)을 영화화한 장예모 감독의 〈귀주 이야기〉는 ‘법’의 도덕적인 한계를 잘 표현한 명작이다. 중국의 깊은 산골 마을에 살고 있는 ‘귀주’(공리 분)의 법정 투쟁기를 다루고 있는 이 영화의 모티브는 다소 희극적이다. 

어느 날 귀주의 남편 만경래는 촌장과 사소한 말다툼을 하다 남성의 중요한 급소를 얻어 차인다. ‘그 곳’이 부어올라 남편을 데리고 병원에 다녀온 귀주―그녀는 만삭의 몸이라 거동이 불편하다―는 촌장을 찾아가 사과를 받으려 한다. 귀주는 아무리 촌장이라도 남자의 ‘중요한 곳’을 차면 안되며, 촌장은 그에 대해 ‘사과’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가난하고 순박한 시골 아낙 귀주가 바라는 것은 ‘미안하다’는 촌장의 말 한 마디. 그러나 촌장은 사과하지 않는다. 그러자 귀주는 법에 억울함을 호소한다. 그러나 법은 엉뚱한 결정을 내린다. 촌장의 ‘사과’가 아니라 ‘치료비’를 물린 것이다. 촌장은 사과를 하기는커녕 오히려 치료비를 땅바닥에 내던진다. 귀주는 치료비를 받지 않는다. 그리고 ‘사과를 받기 위해’ 다시 인민법원에 항소한다. 

그러던 촌장과 귀주의 갈등은 엉뚱한 곳에서 풀린다. 설날 마을사람들이 경극을 보러 간 사이, 귀주는 난산으로 사경을 헤매게 된다. 촌장은 이리저리 뛰어다니며 청년들을 불러모아 눈밭을 헤치며 귀주를 병원으로 옮긴다. 촌장의 도움으로 아기를 무사히 낳은 귀주는 마을잔치를 연다. 촌장도 초대한 것은 물론이다. 이제 촌장에 대한 앙금은 사라지고 없다. 그러나 촌장은 잔치에 나타나지 못한다. 항소 결과 촌장이 상해죄로 공안국에 잡혀가고 만 것이다. 영화는 당혹스러워하는 귀주의 얼굴이 ‘클로즈 업’시키며 끝난다. 

이 영화는 법의 매우 미묘한 문제를 드러낸다. 귀주는 법을 통해 사과를 받고 촌장과 화해하고자 하지만 법은 그런 소박한 요구에 철저히 무기력하다. 귀주의 정서적인 요구와 어긋나게 법정은 엄정한 처벌로 화답할 뿐이다. 

법의 도덕적 한계에 대해 가장 먼저 깨달은 역사적 인물은 아마 공자(B.C. 551~B.C. 479)가 아닐까 싶다. 〈논어〉에서 공자는 아주 묘한 말을 남겼다. “정령(政令)으로 이끌고 형벌로 다스리면 백성들은 형벌만 면하면 부끄러워할 줄 모른다.(위정/3)” 이것을 오늘날에 적용시키면 이런 말이 된다. 법을 엄중하게 적용하여 형벌로 국민을 다스리려 하면, 국민의 관심은 그 형벌을 피하는 데만 쏠린다. 자신의 행위가 도덕적인가, 비도덕적인가 하는 것은 아무런 문제가 되지 않는다. 법망에 걸리지만 않으면, 양심의 가책을 느끼지 못하게 되는 것이다. 

〈논어〉에는 이런 기록도 있다. 초나라의 한 벼슬아치가 “우리 무리에 곧은 자가 있는데 그 아비가 양을 훔치자 자식이 그에 대해 증언했습니다.”라고 하자 공자는 이렇게 답했다. “우리 무리의 곧은 자는 그와 다릅니다. 아비는 자식을 위해 숨겨주고 자식은 아비를 위해 숨겨주니 곧음은 그 가운데에 있는 것입니다.(자로/18)” 공자가 이렇게 말한 것은 가족 이기주의를 두둔해서가 아니었다. 공자는 자신을 낳아주고 길러준 아비를 위험으로부터 보호하는 것은 매우 인간적인 요구로, 법의 범주를 뛰어넘는 자연 법칙의 범주에 속한다고 보았다. 

오늘날의 관점에서 보면, 공자가 다소 이상적으로 보이는 법률관을 가지고 있었다. 그 점은 다음과 같은 말에서도 확인된다. “소송을 듣고 판단하는 것은 나도 남만큼은 할 수 있다. 그러나 필요한 것은 소송이 없게 하는 것이다.(안연/14)” 공자가 추구한 세상은 사실상 법이나 재판이 필요없는 사회였다. 공자는 어떻게 그것이 가능할 거라 생각했을까? 공자는 정치인들이 법이 아니라 덕으로 국민을 다스리면 가능할 것이라고 보았다. 그러면 국민들은 자연히 그들을 따르고 자신의 비도덕적인 행위에 부끄러움을 느낄 것이라고 생각했다. 공자의 이런 생각을 단지 순진하다고만 폄하할 수 있을까? 사람을 다스리는 일을 오로지 법에만 의존하는 오늘날 곰곰히 생각해볼 일이다.      


글쓴이

박민영. 인문작가. 글맛 공방 대표.

한겨레문화센터에서 오래 글쓰기 강의를 했다. 『글을 쓰면 자신을 발견하게 됩니다』, 『인문내공』 등 글쓰기 책과 『반기업 인문학』, 『지금, 또 혐오하셨네요』  등 인문사회과학서를 주로 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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