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정할 수 없는 사실
완전한 끝이 존재할 것 같았던 코로나 팬데믹은 여전히 우리의 평범한 일상을 훼방하고 있다. 작년 하반기부터 감염병 등급이 4급으로 격하됨에 따라 전과 같이 강경한 대응책은 쓰고 있지 않지만, 코로나19 바이러스는 여전히 우리 곁에 존재한다. 지금까지 코로나19 감염자 수는 7억 명이 넘고, 코로나로 인한 사망자는 집계된 것만 최소 700만 명이다. (최소라고 한 이유는 정확히 검사를 하고 코로나 확진을 받은 사람의 수가 그렇기 때문이다. 숨겨진 코로나 확진자와 희생자는 그보다 훨씬 많을 것으로 예측된다) 코로나19 피해는 알다시피 여기에 그치지 않는다. 코로나에 걸려서 심각한 후유증으로 고통을 받거나 사망한 이들도 희생자이지만, 그들의 가족, 친구, 지인들 역시 그에 못지않은 심리적 후유증을 안은 채 여전히 고통 속에서 살고 있다. 심지어 코로나 백신 부작용에 따른 피해자도 상당하다. 하지만 코로나19 바이러스는 우리의 이러한 불편과 희생에는 전혀 관심이 없다. 오로지 그들만의 영생을 위해 지금도 끊임없이 변이하고 있다. 이토록 지독한 코로나19는 단순히 바이러스나 감염병 범주만의 문제가 아니다. 지구 생태계, 기후와 밀접한 연관이 있다.
코로나19와 기후를 연결 짓는 두 가지 견해가 있다. 첫째는 영국 케임브리지대 연구팀의 논문이다. 영국 케임브리지대 연구팀은 중국 남부 원난 지역과 미얀마, 라오스 지역에서 식물 식생의 대규모 변화를 추적했다. 그 결과, 초목 성장에 영향을 끼치는 기온 상승과 일사, 대기 이산화탄소 농도를 포함한 기상과 기후 변화들이 기존 열대 관목 지대를 열대 초원 지대와 낙엽수림으로 바꾸어 놓았다고 보았다. 그 결과로 서식지를 잃은 박쥐들이 다른 여러 곳으로 집을 옮겼다는 것이다. (지금 당장 박쥐 한 마리를 잡아서 검사를 해보면 두세 가지 종류의 코로나바이러스를 달고 있다고 한다. 하지만 박쥐는 높은 운동량으로 인한 고열과 저농도 인터페론으로 인해 바이러스가 사멸하지 않고 박쥐와 공존한다. 지난 100년간 40종의 박쥐가 중국으로 이주했고 한다. 그리고 100종류 이상의 새로운 코로나바이러스도 유입됐다고 한다) 즉, 기후 변화로 인해 박쥐들의 서식지가 더욱 확산되고, 변했다는 것이다.
두 번째로 인간의 무자비한 토지 개간이다. 적절한 대책 없이 늘어가는 인간들의 거주지를 더욱 늘리기 위해, 좀 더 좋은 풍경을 인간들의 시선으로 마음껏 누리기 위해 인간은 자연에 시멘트를 뿌렸다. 개발, 발전, 번성, 행복 등등 온갖 그럴싸하고 평화로워 보이는 단어들을 사용하며 투자자와 사용자를 쉽게 설득했다. (이것은 경작지를 만드는 일과 달리 별로 어려운 일이 아니다. 그냥 풍경 좋은 지역을 골라서 종이 몇 장에 몇 명의 서명을 해버리면 끝나는 일이다) 이는 동식물들의 서식지를 직접적으로 가차 없이 파괴하는 일이다. 또 이것은 첫 번째와 마찬가지로 생태계를 극단적으로 변화시키고, 동식물들의 서식지를 변화시킨다. 아니, 완전히 파괴한다. 이 둘을 관통하는 공통점 하나가 있다. ‘인간의 끝없는 욕망’이다.
다시 한번 재러드 다이아몬드의 말을 빌리려 한다. ‘농업 혁명은 인류 최대의 사기이다.’ 이에 대해 여러 관점이 있지만 이번엔 생태계, 생물 다양성 문제에 대해 논하려 한다. 인간이 수렵 채집 생활을 어느 정도 포기한 채 정착 생활을 하기 위해서는 효율성과 편의성이 가장 높은 작물을 선택해야 한다. 밀, 보리, 쌀, 옥수수가 대표적이다. 이 작물을 가지고 한 종은 고사하고 한 집단이 먹고살려면 꽤 큰 규모의 땅이 필요하다. 하지만 그건 생각보다 쉽지 않은 일이다. 땅 한 줌만 퍼서 현미경으로 들여다보면 수백 가지의 다른 생물들이 살고 있다. 그중에는 익충도 있지만, 해충도 있고, 땅에 숨겨진 한정된 에너지원도 있다. 그뿐만 아니라 성장에 방해되는 돌멩이들이 군데군데 상당히 많이 박혀있다. 또 그 속에는 밀, 보리, 쌀을 먹는 것을 유독 좋아하는 생물들이 있기 때문에 성장에 방해가 된다. 그렇다면 인간은 기르기로 한 특정 작물들을 위해서는 그에 맞는 환경을 구축해 줄 필요가 있다고 생각할 수밖에 없다. 그래서 살기 좋아 보이는 땅을 골라 그곳을 싹 갈아엎고 정착과 경작을 시작했다. 오로지 인간과 경작물을 위한 거주지를 만든 것이다. 그렇다면 인간이 오기 전에 그 땅에서 평화로이 살던 생물들은 어떻게 됐을까? 수백 년, 어쩌면 수천수만 년을 한곳에서 살던 생물들은 어떻게 됐을까? 대부분은 죽어 사라졌고, 일부는 운이 좋게 다른 거주지로 이주를 해서 생존을 이어갔다.
그럼으로써 인간은 정착 생활을 하며 끝나지 않는 노동의 굴레에 빠져들었지만, 나름 성공했다. 목숨을 걸고 사냥에 나가지 않아도 먹고살 만큼의 작물을 키워냈고, 심지어 비축해 둘 수 있을 정도의 잉여 자원을 남겼다. 먹고살 만하니 인간은 더 많은 식솔을 구성해서 살아갈 수 있었고, 인구수는 전에 비해 폭등하다시피 늘어갔다. 구성원이 늘어나니 역할 분담이 세분되었고, 일종의 계급과 규율이 생겨나 강력한 집단을 만들었다.
개체수가 급증하면서 이러한 집단생활을 하는 부족이 늘었고, 지구 곳곳을 채웠다. 당연히 극소수의 경작물만 서식하는 경작지와 농경지, 가축지 역시 늘었다. 그렇게 시간이 흘러 우리가 4대 문명이라고 하는 메소포타미아 문명, 인더스 문명, 이집트 문명, 황하 문명이 발전했다. 그리고 알다시피 그 외의 부족들도 나름의 부족 국가를 만들고, 고대 국가를 거처 중세, 근대, 그리고 지금의 현대 국가를 만들었다. 인간은 수많은 종 중 별다를 것 없는 한 종에 불과했지만, 스스로에게 만물의 영장이라는 호칭을 부여해 최상위 포식자를 차지했다.
처음엔 그저 흙 한 줌 정도의 개간이었지만, 이제는 지구의 대부분을, 심지어 달이나 화성까지 개간하려 한다. 처음엔 단순히, 아마 들짐승을 사냥하며 목숨을 잃는 일보다 더 안전하게 땅이나 일구며 사는 게 좋겠다는 마음으로 시작했을 거다. 그런데 지금 인간의 마음은 어떤가.
축구선수로 이름을 날린 디디에 드록바의 고향은 코트디부아르다. 현재 카카오 생산량의 40% 이상을 차지하고 있는 나라이기도하다. (카카오 농장에서 일하는 사람들이 어떤 처우를 받으면서 일을 하고 있는지까지는 말하지 않겠다. 한 마디만 하자면 2024년에도 거의 노예나 다름없이 일을 하고 있다고 한다) 그렇기 때문에 카카오 생산량이 그 나라 경제력의 상당 부분을 감당한다. 이를 유지하기 위해 해마다 카카오나무 경작지를 늘려가는데, 열대 우림이 1960년 이후 80% 이상 줄어들었다고 한다. 인간은 아니, 당장 내가 먹고 마시고, 누리는 모든 것들은 대부분 이런 식으로 만들어진다.
인간은 경작을 하고, 가축을 기른다. 그리고 정착 생활을 한다. 그를 위해서 아무튼 간에 땅을 전부 불로 태워버리든, 밀어버리든, 갈아엎어 버리든 해야 한다. 지금 우리가 잠을 자는 집, 걷는 도로, 차도, 공원 등 대부분의 공간은 이렇게 만들어졌다. 인간은 그렇게 생존해 왔고, 그렇게 살아가고 있다. 이것은 오롯이 인간만을 위해서 인간이 벌이는 일이다. 그 이외의 것은 거의 고려하지 않는다. 고려한다 해도 인간에게 혹시라도 피해가 오지 않을지 정도를 고려할 뿐이다. 다시 한번 말하지만 우리는, 인간은 그렇게 살아간다. 우리가 이러한 일들을 정말 몰랐던지, 애써 외면했던지 간에 그렇게 만든 초콜릿을 먹고, 고기를 먹고, 카페에 앉아 질서 정연하게 일자로 쭉 새워진 나무나 꽃을 바라보며 커피를 마시고 여가를 즐긴다. 인간은 그렇게 살아가고, 행복을 추구한다.
다시 처음으로 돌아가서 코로나19는 기온 상승과 인간의 무분별한 개간으로 인한 박쥐 서식지 이동에서 비롯됐다는 관점을 소개했다. 그리고 이는 결국 농업 혁명 이래 계속된 인간의 습성과 욕망으로 인한 결과라고 했다.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다. 그래서 어쩌자는 거냐. 농업 혁명뿐만 아니라 문명 그 자체가 지금의 결과를 초래했으니 다시 수렵 채집 시절로 돌아가자는 소리냐. 인간 자체를 부정하겠다는 소리냐. 모든 걸 포기하라는 소리냐. 그건 아니다. 그러자는 의도로 한 소리가 아니다. 재러드 다이아몬드 선생님도 그러자고 한 소리가 아니라고 했다. 난 인간의 생존과 삶의 형식, 가치관 등을 부정하거나 비난하려는 의도로 이런 말들을 늘어놓는 게 전혀 아니다. 그냥 그게 현실이라고 말해줄 뿐이다. 인간을 설명할 수 있는 부분은 많지만, 이 또한 인간의 모습이자, 어쩌면 본질이라고 말할 뿐이다. 내가 계속해서 문명을 거론하며 이 이야기를 반복하는 이유는 어떠한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는 사실을 직시하는 것이 우선이기 때문이다. 행동에 앞서 마음가짐을 달리 가져야 한다는 생각 때문이다. 그러지 못한 행동은 붕 뜨게 되고, 오래 지속되지 못하기 때문이다. 나는 확신한다. 눈앞에 닥친 기후 위기를 해결하기에 앞서 우리가 누리고 있는 모든 것의 근원이 어떠한 역사를 가졌는지 직시해야만 긴 호흡으로 나아갈 수 있다. 그래야 겸손할 수 있다. 기후 위기는 단순히 2024년의 문제가 아니다. 앞으로 이어질 인류와 현시대를 같이 살아가는 모든 생명체의 앞날에 관한 문제다. 처음에 코로나19 바이러스는 인간이 어떤 고통을 겪던 관심이 없다고 했는데, 인간도 기후 위기는 전혀 상관없는 듯 탄소를 그저 뿜어냈다. 그것이 그냥 사실이다. 다시 한번 반복하지만, 인간은 탄소 배출을 통해 거룩한 문명을 구축할 수밖에 없었고, 그것이 지금의 기후 위기를 초래했다. 그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