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무 말도 하지 못한 채

저녁 / 2-4

by 지안

노을이 번지는 해안도로를 따라 천천히 걷고 있었다.

제주의 바닷가, 해는 저만치 기울어 있었고

바람은 조금 느릿했다.

마치, 오래전 마음 한편에 놓아두었던 무언가를

또다시 조용히 흔들어 깨우는 듯했다.


하늘의 빛이 붉게 물들었다가,

이내 서서히 희미해졌다.

꼭, 붙잡지 못한 마음이 저물어가는 것처럼.

아름답지만 손에 닿지 않는 순간들이,

그렇게 내 앞에서도 천천히 사라지고 있었다.


나는 조용히 걸었다.

말없이, 목적지도 없이,

그냥 이 길의 끝 어딘가로 흘러가듯이.


카페에서 펜을 들고도

결국 아무 말도 쓰지 못했던 그 순간들이

이상하게 지금도 머릿속에서 계속 맴돌았다.


그 감정은 결국

그녀에게 전해지지 않았고,

그렇다고 사라진 것도 아니었다.


너무 늦었다는 걸 알면서도,

스스로에게 물었다.


“그녀는 왜 돌아봤을까.”

“내가 그때 말을 걸었다면, 뭔가 조금 달라졌을까.”



그녀가 마지막으로 수업에 나왔던 날은,

겨울의 끝자락,

별다를 것 없는 날이었다.


그날엔

내가 먼저 강의실에 앉아 있었고,

조금 늦게 그녀가 들어와 내 옆자리에 앉았다.

우리 사이에는 인사도, 대화도 없었다.

하지만 나는,

그녀가 자리에 앉는 순간의 기척을

늘 알고 있었다.


수업은 무난하게 끝났고,

나는 평소처럼 먼저 나왔다.

그녀는 강의실에 조금 더 남아 있었고,

나는 뒤돌아보지 않았다.


그게, 우리가 마지막으로

서로의 기척을 공유했던 순간이었다.


그리고 그다음 주,

그다음 학기,

그녀는 다시 나타나지 않았다.


아무런 예고도,

작은 힌트도 없이.


나는 몇 번이고

그녀가 들어오던 시간에

문 쪽을 바라보았지만,

그 문은 조용했다.


그녀도, 나처럼 무언가 느꼈던 걸까.

두어 번 돌아본 그 시선 속에,

단지 궁금함만 있었던 걸까.

아니면 나처럼 말로 하지 못한 마음이 있었던 걸까.


그건 알 수 없었고, 지금도 모른다.

하지만 그 미지의 마음이,

어쩌면 이 감정을 더 오래 남게 만든 것인지도 모른다.



이따금은

그녀가 내 옆에 앉던 그 짧은 거리조차

너무 멀게 느껴질 때가 있었다.


그때 나는

왜 아무 말도 하지 못했을까.


그날, 그날, 그리고 또 그날.

기회라고 부르기엔 너무 조용했던

몇 번의 장면들이 떠올랐다.


말을 걸 수 있었던 순간들,

눈을 맞췄던 찰나들,

그리고 괜히 책장을 넘겼던 내 손.


그 모든 것들이,

지금 와서야

무언가 말이 될 수도 있었던 조각들이었다.


하지만

아무것도 말하지 않은 채

그 모든 감정은 흘러가 버렸다.



노을이 바다에 닿았다.

붉은빛이 파도 위에 흩어지며 조용히 깃들었다.

나는 그 풍경을 오래 바라보다,

가만히 속으로 한마디를 되뇌었다.


“그녀는 지금, 어떤 하루를 살고 있을까.”

“가끔은 나처럼, 그날을 떠올릴까.”


그리고 이어서,

내가 꼭 말하고 싶었던 문장 하나.


“그날, 내가 널 좋아했던 것 같아.

아니, 좋아했어.”


말하지 않았기에

사라졌고,

말하지 않았기에

지금도 남아 있는 감정.


그건 관계가 되지 못했지만,

사랑이라는 감정의 시작이자

끝의 시작이었다.



나는 발걸음을 멈췄다.

햇살은 사라졌고,

저녁이 완전히 내려앉기 직전의 시간.

바람이 얼굴을 스쳤다.

말을 하지 못한 감정이

다시 내 안 어딘가를 천천히 적시고 있었다.


그 감정은 결국 말이 되지 못한 채 남았지만,

이상하게, 그것만으로도 충분했던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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