밤 / 2-5
창문을 살짝 열자,
제주의 밤공기가 조용히 방 안으로 들어왔다.
가로등 불빛이 커튼 틈으로 스며들며
노트 위에 희미한 그림자를 남겼다.
나는 책상 앞에 앉아,
아무 말도 없는 페이지를 가만히 들여다봤다.
손끝엔 펜이 들려 있었지만,
단 한 글자도 쓰지 못했다.
사실은, ‘좋아했다’는 말 하나.
이미 마음속에서 수없이 써온 문장이었지만.
⸻
기억은 늘 말보다 조용히 찾아온다.
그날도 마찬가지였다.
어떤 대화도, 인사도 없었지만
그녀와 스친 순간들은
시간이 지나도 쉽게 흐려지지 않았다.
수업이 끝난 뒤,
내 옆에 잠깐 머물다 떠났던 사람.
돌아보던 눈빛,
내가 말하지 못했던 마음.
그리고,
그녀가 더 이상 수업에 나오지 않았던 날들.
그날 이후,
나는 여전히 문 쪽을 바라보곤 했다.
그 문이 열릴 때마다,
아무렇지 않은 척하면서도
조금은 기대했던 것 같다.
⸻
그녀는 왜 나를 돌아봤을까.
그 시선 속에 뭐가 있었을까.
그게 궁금하지 않다면 거짓말이다.
지금도 가끔 생각한다.
“그녀도 나처럼, 그날을 떠올릴까.”
“혹시 나를 좋아한 건 아닐까.”
그런 물음들이 머릿속에 맴돌지만,
대답은 없고,
나는 어느 순간부터 그 질문을 꺼내지 않게 됐다.
아마도, 어떤 감정은
확인하지 않아야 오래 남는다는 걸
조금은 알게 되었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
사랑을 하지 않았다고 말할 수는 없다.
하지만 사랑했다고,
확신할 수 있는 것도 아니다.
그건 말로 옮기지 못한 마음이었고,
관계로 이어지지 못한 애틋함이었다.
그러니까 굳이 말로 붙일 이름이 필요하지도 않았다.
다만 그 하루,
나는 누군가를 깊이 바라봤고,
그 감정이 지금까지도
내 안 어딘가를 조용히 붙잡고 있다는 것만은
부정할 수 없다.
그 감정이 내게 어떤 말도 남기지 않았지만,
어쩌면
나는 그 안에서 조용히 자라고 있었는지도 모른다.
⸻
나는 노트를 덮고,
잠시 창밖을 바라봤다.
바람은 아직도 불고 있었다.
이야기가 끝나지 않은 것처럼,
밤은 조용히 흘러가고 있었다.
이름 붙이지 못한 감정,
말하지 못한 마음,
그리고,
그럼에도 사라지지 않는 하루.
오늘도, 그 감정은 조용히 내 안에 살아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