올해를 맞이하며 한 가지 바람을 적어보자면 시인의 삶을 조금이나마 살아내고 싶다.
철학적 횡설수설이라 불리기도 하는 카뮈의 시지프 신화에 이런 말이 나온다. ‘삶은 질보다 양이다. 최대한 많이 살아야 한다.’ 정확한 워딩은 아닐 수 있지만, 일부 내용을 나름대로 요약하면 대략 이런 말이었다. 내가 제대로 이해한 게 맞는 건가 싶긴 하지만, 많이 산다는 것은 고상한 것에 심취해 살기보다 사소한 많은 것들을 누리며 사는 것이 중요하다는 말 같다. 즉 일상에 충실하라는 격언이나 ‘순간에 몰두하여 살아라’는 말처럼 말이다.
숱하게 들어서 나뿐만 아니라 다른 많은 사람도 알고 있을 이 말은 말 그대로 말이야 쉽지 몹시 어려운 일이다. 철학은 늘 그런 것 같다. 당연하다고 생각되는 단순한 것들을 멋들어지게 표현해서 선언하면 오히려 무게가 생겨 괜한 부담을 느끼게 만든다.
아무튼 그렇게 살아내려면 또 누구나 알고 있듯 일상을, 지극히 지루하고 평범한 하루를, 아무 일도 없었던 것은 아니지만 일기장에 마땅히 쓸 거리라고는 없는 그 단순한 하루를, 충실하게 몰두하며 살아내야 한다는 말이다. 이건 나처럼 지극히 평범한 직장을 살아내는 사람에겐 더없이 어려운 요구이다. 9 to 6를 하면서 8시간 내내 컴퓨터 앞에만 앉아 있어야 하는 숙명을 지닌 사람에게 시를, 말 그대로 예술을 해내고, 창조활동을 해내 듯 살아내라는 말은 지나친 요구다. 밥벌이를 위해 직장 속에서 내 삶을 소진시키는 모든 사람들에게 버거운 일이다. 다시 한번 말하지만 그 말은 시인처럼 살아내라는 요구와 다르지 않다.
브런치 스토리나 그와 유사한 생태계에서 활동하는 사람들은 그들이 사는 세상에 시선이 쏠려 있어서 지극히 당연한 일들로 보이지만 - 사실 그 안에 속한 사람들 역시 얼마나 처절한 몸부림을 치는지는 굳이 부언하지 않아도 알 것이다. - 그런 마당에 그 무리에 속하지 않은 사람들은 어떠랴. 내 주변만 봐도 나 같은 사람은 유별하다. 글을 쓰는 사람은 단 한 사람도 없다. 예술을 하는 사람 역시 단 한 사람도 없다. 심지어 글이라고는 읽지 않으려 하는 사람들 천지다. 오직 영상 미디어만 소비하는 사람들이 대부분이다. 말 그대로 황무지에 홀로 선 나무 한 그루 같은 처지이다. 그런 곳에서 성장하기는커녕 올곧게 서있는 것조차 불안하고, 두렵다. 그럼에도 난 독수공방, 약속을 미루고 혼자 책을 읽는 날을 늘리려 노력한다. 이유는 설명하기 어렵다. 그냥 난 그렇게 살아내야 하는 사람으로 태어난 것이다. 그래야만 살고 있는 것 같다. 운명처럼 말이다.
‘머뭇거림은 긍정적 태도는 아니지만, 행동이 노동의 수준으로 내려가는 것을 막는 데 필요불가결한 요소이다.’라는 말처럼 돌멩이 굴러가는 듯 한 삶을 지양해야 한다. 이러한 머뭇거림이 민들레 꽃을 볼 수 있게 만들고, 그러한 시선이 다른 민들레 한 홀씨를 심을 수 있는 힘들 만든다. 이처럼 팍팍한 일상인 와중에 그나마 우리가 해낼 수 있는 일은 시인의 삶을, 마음과 생각을 들여다보는 일이다. 그곳조차 놓치고 산다면 말 그대로 찌든다. 그러기 위해 가장 먼저 해야 할 일은 다름 아닌 스마트폰을 멀리 하는 것이다. 도파민 환각에서 벗어나야 한다. 오락거리라고는 밤하늘의 별을 보는 것, 계절의 흐름을 묵도하듯 바라보는 것이던 때처럼 살아내려고 노력해야 한다. 그러려면 쉴 새 없이 쏟아지는 콘텐츠 속에서 휩쓸리는 태도를 바꿔야 한다. 습관처럼 핸드폰을 들어 올릴 때마다 머뭇거려야 한다. 시간의 공백에서 오는 지루함을 견뎌내야 한다. 참 어려운 일이지만 그래야만 한다. 요즘 흥하는 숏폼이 우리의 정신건강을 얼마나 흐트러뜨려 놓고, 관계를 와해시키는지 굳이 강조하지 않아도 알 거라 생각한다.
시멘트 더미로 뒤덮인 길가와 같은 일상에 틈을 벌려 민들레 한 홀씨를 심어 내야 하는 책무를 지닌 사람들이 시인이라고 생각한다. 나는 처음에 이들과 같은 삶을 조금이나마 살아내고 싶다고 했다. 하지만 나는 아직 그 힘이 너무나 미약해 그들에게 시선을 보내는 수준만으로 만족해야 하는지도 모르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