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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양수리 감성돈 Dec 21. 2020

병원 내 집단감염 속에 내 가족이 있다

어제의 단상 4편을 올립니다.


단상1.

고모가 입원한 병원, 집단감염이 시작되었다. 

며칠전에 알고 있었는데... 오늘 실시간 검색어에 오른 것을 봤다.

그리고 댓글들을 보면서 마음이 아파졌다.     

당뇨가 있는 고모, 치아 상태가 좋지 못한 고모에게 연말에 기분 좋은 선물을 하고 싶었다.

편지를 쓰고, 뽀글이 점퍼를 주문하고, 당뇨라서 단 것 먹으면 안되기에 당이 첨가 되지 않은 딱딱하지 않은 스낵들과, 생필품을 차곡차곡 모아두고 있었다. 병원에 연락했더니 당분간은 우편물 보내지 않았으면 하길래... 난 우편물 보낼 날만 기다리고 있었다.    


밥 먹는것에 엄청난 행복을 느끼는 나인데, 어제 귤 2개 먹은 게 다이다. 오늘은 이러다가 내 몸도 안 좋아지면 안될 것 같아서 밥 숟가락을 입으로 떠 넣었다. 맛이 전혀 기억나지 않는다. 계속 자고 싶다. 잠으로 인한 충전이 아니라, 잠으로 도피하고 싶다. 몸에서 냄새가 나길래 샤워는 했는데, 바디로션을 바르고, 머리를 빗질하고 싶은 마음도 없어서 그냥 옷을 주워 입고 이 글을 쓴다.     

이번 겨울은 혹독하다. 


단상2.

친한 엉아에게 연락을 했다. 

고모도 걱정이지만, 엉아는 내가 멘탈 털려서 공황 올까봐 걱정이다. 

아! 맞다, 내 공황.

정신이 번쩍든다.    

나까지 이러면 안되지.

나까지 할머니의 감정에 동화되어 애 끓이면 안되지,

나마저 여론에 흔들리면 안되지,

나마저 무너져버릴, 부서져버릴 생각들을 하면 안되지.

이.너.피.스.    

감성돈은 오늘도 건강하게 흔들리는 중입니다. 

내 멘탈이 꽤 .. 회복탄력성이 좋습니다.


단상3.

머리 감고 빗질도 안 하고

롱패딩을 입고

마스크를 쓰고 어디에도 나란 사람을 모르게. 

일부러 조명이 없는 어두운 시골 동네 길 한 바퀴를 돌았다.

36세 어른 여성이 소리내어 울면서 딱! 한바퀴를 돌았다.

어깨가 떨리며, 속에 뜨거운 게 끓어 올랐다. 

너무 무서웠다. 그냥 지금이 너무 무서웠다. 

더 울면 나도 힘들어져.

일부러 돌고 돌아- 단골 카페 앞에 섰다.

눈물을 닦고, 숨을 돌아 쉬고,

카페에 가서 차를 주문했다.

그리고 테이크 아웃해서 집으로 돌아왔고, TV를 켰다.

일요일 저녁마다 보는 코미디 프로그램이 이렇게 재미없었던가.     

거기까지! 

어찌됐든. 내일 또 봅시다. 굿나잇. 


단상4.

우리 고모는 조현병 환자이다. 내가 태어났을때부터 그랬고, 지금도 그렇다. 그리고 같이 살았다. 

대학원 논문을 쓸 때 정신장애인을 대상으로 논문을 썼다. 대학원때 실습도 정신장애인 사회복귀시설에서 했고, 늘 봉사활동 다니고, 숱한 사람들을 봐 왔다. 

나는 공황장애와 조울증으로 자발적 보호병동에 입원한 바 있다. 그래서 수많은 사람들을 만나봤다.

이제 내가 말해도 될 명분이 조금 있다고 생각하며 몇 마디 해본다.     

우리 고모는 현재 정신병원에 입원중이다. 2020년 1월 외박을 나와서 같이 지냈고, 2월부터 코로나 상황이 나타나면서 집단감염의 우려로 병원에서는 면회, 외박, 외출 등 모든 걸 통제했다. 그런데 며칠전 신문과 TV방송에서 대문짝만하게 고모가 입원한 병원의 집단감염이 시작되었음을 알렸다. 2월부터 모든 것이 통제되었던 우리 고모와 다른 환자들이 감염의 매개체가 되었을까? 고모는 우리가 찾아가지 않은 때부터 본인을 버렸다고 생각했다. 왜 찾아오지 않냐고. 전화통화를 하며, 우리는 고모를 버린 게 아니라 상황이 이래서 그런거니까 통제가 풀리면 갈 것이라고 말했다. 그러나 고모는 납득하기 어려웠다. 보이지 않는 공포와 불안을. 고모가 쉽게 납득할 수 있을까?     


집단감염이 시작된 이후. 분명 하얀색 방호복을 입은 사람들이 왔다갔다 할 것이다. 매일 변함없는 일상 속에 어느 순간 변화된 옷차림들. 그리고 한 명 한 명씩 감염되었다고 어딘가로 데리고 간다. 정신병원에 자발적으로 가지 않은 이상, 하얀 옷을 입은 사람들이 태워서 왔을텐데, 병원에서 조차 어딘가로 또 데리고 간다면, 당연히 겁먹지 않을까? 또다시 하얀 방호복을 입은 사람들이 코로나에 감염된 환자를 이송해서 데리고 간다면, 나 같아도 무섭고 겁먹을 것 같다. 갑자기 달아난 사람 또한 무서웠던 것 아닐까. 코호트 격리를 한다고 하던데, 그 안에서 우리 고모는, 그 곳에서는 인권이 있을까. 이정도 말하면 그럼 입원을 왜 시켰냐고, 탈시설화 이야기를 꺼낼 수도 있고, 지역사회복귀 이야기가 나올 수도 있다. 가족들 입장이 되지 않고서는 함부로 그런 말 꺼내면 안된다. 우리는 안 해봤겠는가.  

   

이건 알베르 카뮈의 <페스트>느낌이 아니라, 빅터 프랭클의 <죽음의 수용소에서> 기분이다. 내가 공황장애와 조울증으로 정신병동에 입원했을때도 면회 온 아버지에게 날 버리지 말아달라고 울면서 싹싹 빌었다. 내가 자발적으로 보호병동으로 가놓고, 모친도 날 버렸기에 아버지도 병 때문에 버릴 수 있다는 생각에 난 이성이고 뭐고 눈물 콧물 흘리면서 아버지께 빌었었다. 그곳에서는 어떤 일이 벌어지는지, 공황장애와 조울증으로 입원했던 사람도 벌벌 떨었던 상황이 무엇이였는지. 왜 이송중에 달아나게 되었는지... 당사자의 입장에서 한번씩만, 조금씩이라도 생각해주기를.     


내 글의 결론은 모르겠다. 어제 내가 울었던 이유 중에 반은 이거였다. 나머지 부분은 말을 꺼낼수도 없다. “세상이 왜이리 시끄러운 것이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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