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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고산 Jul 31. 2019

한국인만 모르는 한국의 보물 '두레'

고산/임마누엘 페스트라이쉬 교수의 한국문화 찾기

오래전 누군가가 나에게 한국의 첫 이미지를 물은 적이 있다. 어느 정도 긍정적인 대답을 기대하는 질문이었다. 그런데 굳이 그 의도에 맞는 대답을 하고 싶은 맘이 없었다. 

그 당시 한국에 대한 첫인상은 그리 유쾌한 것은 아니었다. 당시 느낌으로 한국 사람들은 시끄럽고, 도로는 지저분했다. 또한, 도로의 차들은 위협적일 정도로 난폭했다. 적어도 내가 겪은 다른 개발도상국의 이미지와 크게 다를 건 없었다. 


그러다 어느 정도 시간이 흘러 다시 한국을 방문하면서 내가 가진 선입견이 부끄럽게 느껴졌다. 이전에 가졌던 한국에 대한 나의 이미지는 겉만 보고 판단했던 것임을 알게 되었다. 나의 한국에 대한 인상을 극적으로 변하게 만든 것은 사람들 사이의 관계였다. 일종의 사교 문화, 혹은 사회적 유대관계라고 말할 수도 있는 한국 사람들 사이의 관계는 다른 나라들에서 쉽게 찾아볼 수 없는 것들이었다. 


한국 사람들은 사람과의 관계에서 중국이나 일본 사람들과는 전혀 달랐다. 중국 사람들은 여유 있고 인내심이 큰 것처럼 보이지만, 내가 겪은 그들은 다른 사람들에게 아주 심한 경계를 하고 있었다. 이는 ‘명과 청을 거치면서 만들어진 유교 문화의 영향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들은 다른 사람과의 관계에서 자기 사람과 바깥의 외부 사람을 철저하게 구분한다. 


중국인, 일본인, 한국인


이러한 그들 문화 속의 관계를 ‘꾸안시’라고 부르고 있었다. 한국어로 ‘관계(關係)’라는 단어의 중국식 발음이다. 그런데 한국의 관계와는 전혀 다른 의미로 쓰이고 있었다. 그들에게 ‘꾸안시’란 자신의 영역이나 능력을 나타내는 의미로써 더 자주 쓰인다. 다시 말해 자신의 세력을 확장하기 위해 많은 사람과 만나는데 일종의 투자 개념이다. 

언젠가는 자신에게 이익이 될 것을 기대하며 만나는 것이다. 어찌 보면 ‘공존의 관계’를 드러내는 말일 수도 있다. 결국, 그들에게서 관계란 혈연과 우정이 아니면 물질적인 바탕을 두는 관계인 것이다.


그래서 친구를 뜻하는 ‘펑여우(친구, 朋友)’는 한국에서 말하는 친구와는 근본적으로 다른 개념이다. 중국에서 친구로서 식사 자리를 갖는다는 것과 한국에서 친구로서 만나는 것은 작지 않은 차이가 있다. 

중국에서 식사를 같이 한다는 것은 한국보다 더 큰 의미가 있다. 

그들은 자신이 음식 대접을 받았다면 ‘왜 내가 음식 대접을 받았는지’, ‘대접을 받은 후에 나는 어떻게 해야 하는지’를 잘 알고 있다. 선물을 주고받을 때도 마찬가지다. 그들은 선물을 주고받으면서 관계가 형성된다. 선물은 관계의 매개체다. 그 선물을 주는 사람은 상대방에게서 그에 상응하는 이해관계를 얻기 위해 주는 것이다. 하지만 이러한 꾸안시가 이루어지지 않은 사람들에 대해서는 차갑고 무정하게 대한다. 


중국의 꾸안시 문화는 한번 맺어질 경우, 그 관계는 급속도로 친밀해진다. 만약 꾸안시를 맺은 친구가 돈이 없다면 자신의 재산을 털어서라도 도와주는 것이 바로 꾸안시 문화다. 반대로 그것이 깨진다면 둘 사이의 관계는 영원히 끝나는 것이다. 더 이상 돌이킬 수 없다. 그래서 중국에서 사업을 하는 사람들은 이러한 문화를 아주 중요하게 생각한다.


일본의 경우 중국과는 아주 다른 색을 가지고 있다. 그들은 조화를 중요하게 생각하는데 이 때문에 주변 사람들과 다르게 행동하기를 꺼린다. 그래서 큰 집단에 소속된 작은 나로서 존재하길 원한다. 그러다 보니 내가 무엇을 능동적으로 결정하기보다는 다른 사람은 어떻게 생각할까를 먼저 생각하고 다른 사람의 행동 양식에 자신을 맞춘다. 


예를 들면 식당에서 회사 동료들과 같이 식사를 하러 갔을 때 자신의 입맛에 맞지 않는 음식이 나오면 한국 사람은 별생각 없이 그 음식에 대해 투정도 하고 따지기도 하겠지만, 일본 사람들은 그렇지 않다. 다른 사람들이 맛있다고 하면 그도 그 음식에 대해 맛있다고 말한다. 자신의 의지와는 전혀 상관없는 말이라도 튀지 않기 위해 그렇게 말하는 것이다.


한국 속담에 ‘모난 돌이 정을 맞는다’라는 말이 있다. 일본인은 그 말을 항상 가슴에 새기고 있다 해도 과언이 아니다. 

‘쓸데없이 나서거나 튀었다가 혹시 미움이라도 사면 어떡하나’, ‘이게 혹시 나에 대한 공격의 빌미가 되면 어떡하나’ 하는 생각을 하고 있다. 결국, 그 집단에 지속해서 속해 있으려는 마음에 자신을 감추는 것이다. 그것이 힘들어지면 결국 한때 일본의 사회적인 문제가 되었던 이지메(집단 괴롭힘)로 연결되는 것이다. 그들은 그것을 너무도 잘 알고 있다. 

이러한 이유로 일본은 한국이나 중국보다도 더 엄격하게 사회적인 서열을 중시한다. 그들은 두 사람이 만나도 나이를 따지거나 직장의 직급을 따진다. 


이러한 일본인들의 성향은 어디에서 출발한 것일까? 흔히 외국인들 사회에서 일본은 ‘매뉴얼 사회’라고 한다. 즉 모든 것을 매뉴얼화해서 그에 맞춰 행동뿐만 아니라 감정이나 생각까지 제어하는 것이다. 

일본의 매뉴얼화한 사회는 도호쿠 대지진과 같은 매뉴얼 이상의 문제에서 대처가 어렵다

일본이 2차 대전에서 일본 전체의 국력을 끌어낼 수 있었던 것이나, 패전국에서 급속도로 경제를 일으켜 세울 수 있었던 것도 바로 이러한 매뉴얼 사회였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다. 

이러한 매뉴얼 사회는 2011년 3월 도호쿠 대지진에서 보여준 그들의 모습에서도 잘 드러난다. 수만 명이 목숨을 잃고, 심지어 원전이 폭발해 언제 원자로에서 방사능이 유출될지 모르는 위급한 상황에서도 그들을 아이티나 다른 나라처럼 약탈이나 사재기 등의 모습을 보이지 않았다. 심지어 부모나 자식 등 가족의 죽음에도 쉽사리 감정을 드러내지 않았다. 

어릴 때부터 매뉴얼에서 제시한 대로 움직이는 것이다, 이렇게 침착한 그들의 국민성을 두고 세계는 놀라기도 했다. 


하지만 매뉴얼에 없는 상황이라면 어떨까? 사실 도호쿠 대지진에서 그들이 점차 이성을 잃어간 것은 그 상황이 매뉴얼에도 없는 것이기 때문이다. 쓰나미가 10m 정도까지 올라갈 때 어떻게 대처하는지 알고 있지만 그를 넘어선 20m에 달하면 그들이 어떻게 대처해야 하는지 매뉴얼에 없었다. 그들은 매뉴얼 이상의 슬픔에서 감정을 어떻게 처리해야 할지 모르는 것이다. 


이러한 일본의 문화와 달리 한국은 사람과의 관계에서 아주 우호적인 문화를 갖고 있다. 한국에서 말하는 ‘이웃사촌’은 혈연관계가 아니어도 끈끈한 관계를 맺을 때 주로 쓰인다. 한국 사람들은 이것을 ‘정’이라고 말한다. ‘정’의 관계는 사랑이나 우정과는 다른 오랜 만남과 소통을 통해 자연스럽게 만들어진 마음의 교감이다. 그런데 특이한 것은 한국에서 이런 ‘정’의 문화가 개인을 넘어 지역 사회 전체에 퍼져 있다는 것이다.


이웃이 가족이 되는 나라, 한국


나는 한국의 마을 단위의 이러한  ‘정’의 문화로 ‘두레’나 ‘품앗이’를 찾을 수 있었다. ‘두레’란 농번기에 농사일을 공동으로 하기 위해 마을 단위로 만든 조직이다. 이런 두레와 유사한 개념이 품앗이다. 두레는 마을 단위로, 품앗이는 일대일로 노동력을 교환하는 것이 차이다. 


품앗이는 작은 힘이라도 보태 부족한 노동력을 채우는 것으로, 서로 도우며 같이 살아가는 것을 중시한 면면히 이어온 상부상조의 보물 같은 정신이다. 어찌 보면 두레와 품앗이는 전통적으로 농경 문화인 한국에서 나타난 것은 자연스러운 일이다. 노동력이 가장 중요한 자원인 농경 사회에서 모두가 일손이 부족할 수밖에 없었고, 처지가 비슷한 사람 간 더불어 살아가는 지혜로 두레와 품앗이가 나타났다. 그 지혜가 모여 문화가 되고 서로 간에 일체감을 다지는 소중한 정신으로 발전했다.

김홍도의 풍속화집에 나타난 공동체 문화

나아가 두레에는 노동력의 나눔뿐 아니라 마을의 정치·경제·사회·문화가 모두 녹아 있다. 어찌 보면 한국 사회에 자연 발생한 사회복지의 출발이라 할 수도 있다. 

김홍도의 풍속화집에 나타난 공동체 문화

이러한 두레의 공동체 정신은 조선 시대까지 대를 이어 전해져 내려오다 일제강점기 이후 그 기능을 상실하기 시작했다. 

당시 일본은 조선을 지배하기 시작하면서 정치·경제적인 측면에서 뿐만이 아니라 문화와 민족정신까지 없애려는 민족문화 말살정책을 폈다. 이를 수행하기 위해 1910년 국권침탈 초기부터 조선 문화, 특히 정신문화에 관한 연구가 광범위하면서도 치밀하게 진행되었다.


그렇게 겨우 명맥만 유지해오다 산업화 시대에 이르러 빠른 속도로 사라지기 시작했다. 농사의 규모가 커지고 기계화가 이루어지자, 농촌을 지키며 공동체 정신을 이어오던 사람들이 대부분 농촌을 떠났다. 거기에 사회에 급속히 퍼진 개인주의와 이기주의가 치명상을 입혔다. 


오늘날 공동체의 문화와 경제, 사회 시스템이 개인화하고 물질적으로 풍요로워지면서 나를 중심으로 세상이 바뀌어 갔다. 이웃이 무엇을 하는지, 누군가 위기에 처하지는 않았는지, 외로이 고독사하고 있지나 않은지를 살피던 시절의 '함께'의 정신은 찾아보기 어려워졌다. 


한국이 자랑하던 공동체 의식이 강하게 작용하는 집합적인 문화, 두레. 

이 두레는 가문이나 신분에 바탕을 둔 혈연공동체와는 달리 마을 주민들이 연대 의식을 가지고 평등한 관계로 만나던 전통이었다. 어렵고 힘든 일을 서로 도와가면서 살아왔던 조상의 아름답고 슬기로운 풍습이다. 그런데 이 두레가  이제 전설이 되어버린 느낌이다. 


아름다운 이웃, 사라지는 이웃


두레의 실종에는 개인주의뿐 아니라 도시화도 한몫했다. 도시화가 진행되며 잃은 대표적인 것이 함께 나누는 공간이다. 

내가 한국에 와서 대전과 서울을 살며 숱하게 들어온 말이 단일 민족이다. 한국 사람들은 이 말에 자부심을 느끼고 이러한 인식을 바탕으로 사람들 사이의 유대감을 형성하고 있었다.

‘이웃사촌’이란 말도 어쩌면 이웃조차 가족의 일원으로 받아들이는 문화의 적극적인 표현일 것이다. 한국사를 공부하며 한국인의 이웃을 대하는 마음은 전통으로 자리 잡고 있음을 알았다. 이웃이 어려움에 빠지면 함께 돕는 향약, 두레, 품앗이 등을 통해 이 전통이 나타난다고 배웠다. 한국 사람들은 마을이라는 테두리 안에서 정을 키우고, 서로 나누며, 어우러져 왔다. 


그러나 한 가족의 범위가 축소되고 도시화와 산업화로 점차 바쁜 일상에 자기 한 몸 챙기기도 어려워지면서 이웃이라는 개념도 희미해지고 있다. 예전에 ‘우리 마을’이라는 작은 공동체는 더 협소해져 ‘우리 집’이라는 극히 제한적인 범위로 줄었다.


이러한 현상은 서울과 같은 대도시에서 더욱 두드러진다. 사회기반시설이나 문화적 혜택, 도시미관, 경제적 기회 등은 시골보다 월등히 풍요롭지만, 전통적으로 한 사회를 이루는 최소 단위였던 마을은 점차 그 역할을 잃어가고 있다. 


한국은 세계 어느 나라보다 빠른 속도로 변해왔다. 조선 시대와 60년대 이전의 농업에 기초한 사회 구조에서 도시화로 상징되는 산업 사회로 근본적인 사회 형태부터 변했다. 그 때문에 농촌에서 도시로의 이동도 급속히 진행되었다. 그러면서 이웃 간의 쌓인 담은 갈수록 높아졌고, 변화된 생활양식은 지극히 개인적인 문화의 형태로 나타나고 있다.


이를 두고 시몬 베유(Simon Weil, 프랑스의 사상가)는 “산업화, 도시화 그리고 개인화로 특징지어진 현대사회는 인간의 삶의 문화와 생활공간의 상실 즉, 공동체 붕괴를 가져왔다”라고 극단적으로 표현하기까지 했다.

인도의 정신적인 지주인 마하트마 간디조차 그의 책 『마을이 세계를 구한다』에서 “미래 세계의 희망은 모든 활동이 자발적인 협력으로 이루어지는 작고 평화롭고 협력적인 마을에 있다.”라고 말하고 있다. 


간디는 우리의 미래가 마을에 달려있다고 내다봤다. 그러면서 자발적인 풀뿌리 주민 운동을 강조한다는 점에서 서울의 몇몇 마을 공동체 운동과 닿아있다.

마을을 되찾고자 하는 노력은 잃어버린 소중한 고향이며, 간디의 말처럼 희망이 있는 미래로 가는 비상구이다. 마을은 가장 작은 단위의 소통과 변화가 시작되는 곳이다. 


성미산에 희망을 심다.


나는 한국의 두레 전통을 찾다 한 마을에 집중하게 되었다. 바로 성미산 마을이다. 성미산 마을이 세간에 오르내린 지는 얼마 되지 않는다. 비록 성미산이라는 이름을 갖고 있지만, 성미산의 해발은 약 66m, 면적 12만㎡(약 4만 평)에 불과하다. 그저 어디서나 볼 수 있는 작은 야산이다. 그런데도 성미산은 마포구에 있는 유일한 자연 숲이다. 이미 인근에 있던 산들이 주거재개발로 산이라는 특성을 잃었기 때문이다. 

성미산이 사람들의 입에 오르내리게 된 계기는 따로 있다. 행정구역상 성미산 마을은 아니지만, 누구나 이곳을 성미산 마을이라고 부르는 데는 ‘성공한 마을 공동체’라는 이유 때문이다. 

성미산 마을

이곳에 마을이 처음 꾸려지게 된 것은 1994년 무렵이다. 자녀 양육 고민하던 부모들이 나서서 ‘공동육아’ 시작한 것이 시초였다. 비록 시작은 소소한 것이었지만 시간이 흐르면서 이렇게 연결한 끈은 마을공동체로까지 발전했다. 처음 공동육아를 시작한 주민들은 십시일반으로 어린이집 운영자금을 모으고 교육에도 직접 참여했다. 성미산은 이들에게 자연교육과 공동체 교육의 소중한 장이었고 자연과 함께 하는 아이들의 공동 놀이터가 되었다. 


성미산 마을에서 인터뷰한 K 선생님은 성미산에서 아이들의 모습을 ‘생태적으로 사는 삶’이라 이야기한다. 

“공동체가 그 안의 순리를 따라 살고 있어요. 도시에서는 이것을 꿈꾸기 힘들죠. 그런데도 우리는 해보겠다는 것은 교육 내용과 마찬가지로 사람들의 관계가 그래야 한다는 것이 전제되어 있어요. 그래서 아이들의 일과도 그렇게 따라가고 있죠. 사계절 꽃피고, 무슨 벌레가 있고, 이런 것들을 아이들이 다 알고 있어요. 어린이들도 절기에 맞는 놀이를 하고요. 어린이집 내에서의 활동들은 부모들이 직접 데려오고 데려가고요. 근처에 있는 박물관에도 가고, 산에도 가고 합니다.” 


성미산 마을이 행정적인 용어가 아닌 성미산을 주변으로 하고 그곳을 삶의 터전으로 하는 사람들이다 보니 범위도 제한이 없었다.


성미산 주민이라는 개념은 행정구역으로의 ‘성미산 마을에 산다’라는 것이 아니고, 관계로 연결되어 있다는 의식을 하고 있다. 성미산 마을에 대해 실태조사를 할 때도 행정적인 것보다는 심리적인 것들이 반영된다. 

예를 들어서, 상수 쪽에 살아도 성미산 주민이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있다. 이것은 지역적인 거리가 아니라 정신적이고 심리적인 거리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어떤 사람은 극장에서 하는 공연, 연극을 너무 좋아해서 성미산의 동아리에 참가한다. 


아이들이 학교에 갈 나이가 되면서부터는 서로 힘을 모아 ‘성미산 학교’라는 대안학교도 만들었다. ‘성미산 학교’는 국내 첫 12년제 대안학교다. 다른 학교들처럼 성적 위주의 경쟁을 강요하지 않고 ‘마을이 학교고, 학교가 마을이다’라는 모토로 생태주의 철학을 가르친다. 

학교 입구에는 자전거가 한가득 주차돼 있고, 학교 벽면에는 'So Everything that makes me whole freedom(그러므로 이 모든 것이 우리를 자유롭게 한다)'이라고 적혀 있는 낙서가 눈에 띈다. 

엄밀히 말해 성미산 학교는 학교를 인가를 받지 않았기 때문에 비영리 교육단체로 들어간다. 성미산 학교의 관계자에 따르면 비인가와 미인가를 다르게 설명하고 있다. 예를 들어 인가를 받게 되면 국가로부터 어떤 지원을 받을 수 있다. 그런데 그 대신 교사를 뽑을 때 사범대 출신과 전공자의 비율이나 운영과 관련해 지시를 받아야 한다. 


그런데 이곳의 마을 학교는 이와는 달랐다. 성미산 학교는 목공에 뛰어난 부모가 그 분야에 교사가 되기도 하고, 동네에 반찬을 잘 만드는 분이 있으면 이분이 요리선생님으로 오기도 하는데 이들이 꼭 사범대를 나와야 할 필요는 없다는 것이다. 학원 대신 부모가 직접 나서거나 교사를 고용해 방과 후 교실을 차렸다.


그러다 보니 자연스럽게 원하는 것과 현실이 일치하게 된다. 대부분은 교육 현장에서와 현실의 틈이 항상 일치하는 것은 아니다. 갈등도 있고 의사소통 때문에 심리적으로 힘들기도 하지만, 성미산 학교는 이러한 문제에 대해 적극적으로 대응한다. 관계에서 풀리고, 화해하고, 연결된다. 이런 것들이 반복되는 것이 삶의 일반적인 모습이라면 이것을 진실하게 표현하는 것, 이것이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학교도 이런 방향으로 가고 있다고 보고 있다.


학교를 세우고 나서 아이들에게 유기농 음식을 먹이기 위해 12명의 엄마가 조합비를 내 누구나 안전하고 질 좋은 음식을 먹을 수 있도록 생활협동조합을 만들고 유기농 농산물을 취급하기 시작했다. 


이와 함께 친환경 마을식당인 ‘성미산 밥상’이 문을 열었다. 유기농 반찬이필요하던 ‘직장맘’들이 ‘동네부엌’도 차렸다. 생협 옆에는 의류, 생활용품, 문구류 등 재사용하기 위해 만든 되살림가게를 열었다. 이곳에서는 ‘두루’라고 불리는 지역화폐를 사용하며 수익의 일부를 마을로 되돌렸다. 가게의 운영은 자원봉사자가 3시간씩 돌아가면서 하고 있다. 뜻이 맞는 사람들이 함께 사는 공동주거공간(co-housing)도 만들었다. 


공동주택은 여러 가구가 한 건물에 같이 살면서 개인 공간과 별개로 공동체 생활을 누릴 수 있는 공간을 두고 있다. 그곳을 매개 삼아 삶의 일정 부분을 공유한다는 것이다. 공유 공간은 거실이 될 수도 있고 주방이 될 수도 있다. 세탁실을 공유하기도 하고 짐을 쌓아둘 수 있는 창고를 공유하기도 한다. 그런 공유 공간에서 입주민들은 식사, 빨래, 육아, 취미 생활 등을 이웃과 함께한다. 입주자들이 건축가를 불러서 원하는 공간을 직접 설계했다. 


이렇게 협력해서 일을 같이 하다 보니 자신감도 늘고, 커뮤니티도 커지면서 함께 할 수 있는 일이 더욱 더 많아졌다. ‘성미산로6길’이라고 쓰인 팻말이 달린 골목 초입에 가면 ‘작은나무’라는 카페가 나오는데, 아토피가 심한 아이가 먹을 아이스크림을 만들던 곳이 주민 쉼터가 됐다. 

이곳은 마을 주민들이 공동 출자해서 운영위원단을 만들어 메뉴와 재료를 결정한다. 카페 곳곳에 주민들의 사진이 걸려 있는데, 누구나 편하게 오갈 수 있어 ‘동네 사랑방' 구실을 톡톡히 한다. 이곳은 방과 후 아이들도 들르고 마을에 견학 온 사람들이 마을 소개를 듣기 위해 머물기도 한다. 


일 년에 한 번씩 마을 축제도 여는데 축제를 기획하는 것도 마을 사람들의 몫이다. 마을 축제를 통해 문화를 공유한 부모들이 밴드와 풍물패를 만들어 활동한다. 


일부에서 마을공동체의 폐쇄성에 대한 비판이 있었던 것으로 안다. 그런데 성미산마을 축제의 장에 가보니 주변의 비판과 한계는 어디에서도 찾아볼 수 없었다. 한마디로 어울림의 장이었다. 마을공동체가 가진 힘이자 선물임을 알 수 있었다. 국내 최초로 마을 주민들이 모금을 통해 ‘성미산 마을극장’까지 만들어졌다. 

성미산 마을의 이야기를 다룬 다큐멘터리 〈춤추는 숲〉이 사람들의 화제로 떠오른 적이 있다. 이 다큐멘터리에서는 새로운 공동체 문화를 찾아가고 또다시 부딪친 마을의 진로 문제를 해결하며 길을 찾아가는 과정을 스크린에 옮겨 놓고 있다. 


성미산 마을에 한바탕 회오리가 몰아친 것은 성미산을 깎아내고 배수지를 만들려는 서울시 정책이 입안되면서이다. 주민들이 하나가 되어 이 계획이 효과가 없음을 확인시키며 서울시를 설득해 결국 개발계획을 보류하게 했다. 서울시 관계자들도 “이례적인 일이었다”고 평가했을 정도다. 

주민의 생활과 교육의 터전인 마을의 환경을 살리려는 노력은 성미산마을 공동체가 어느 정도 활성화된 이후였기 때문에 가능했다. 


그러다가 또다시 위기가 닥쳤다. 한 교육재단에서 성미산을 깎아 학교를 이전하겠다고 나선 것이다. 서울시가 이를 허가했기 때문이다. 바로 이 문제를 해결해가는 마을의 움직임을 다룬 것이 ‘춤추는 숲’이었다. 주민들은 “재단이 헐값에 사들인 성미산에 많은 것을 우겨넣기 위해 짓고 올리고, 생태계를 파괴하고 훼손하고 있다”라며 거부했다. 

서울의 곳곳에서 재개발·뉴타운사업이 한창일 때, 성미산 마을 공동체의 역할은 사람들에게 깊은 울림을 줬다. 도시계획에 대처하면서 사후 대책보다는 사전 대안이 얼마나 중요한 것인가를 보여주는 것이다. 


성미산 마을 주민들이 출연한 영화는 이 작품뿐이 아니다. 이숙경 감독의 극영화 〈어떤 개인 날〉에도 다수의 주민이 배우로서 참여했다. 이 영화는 베를린영화제 포럼 부문에 초청돼 넷팩(아시아영화진흥기구)상까지 받았다. 이 영화는 국내에선 성미산 마을 극장에서 처음 상영회를 했다. 


다큐멘터리 〈경계도시 2〉의 홍형숙 감독도 성미산 마을 주민이다. 영화는 마을 주민들의 높은 관심 속에 마을 극장 영사기에 걸렸다.

영화 상영뿐 아니라 마을 극장에선 콘서트, 연극, 뮤지컬, 전시회 등이 이어졌고, 마을 주민들이 참여한 공연도 무대에 올랐다. 20세가 되는 청년들의 성인식도 주민들의 참여 속에 매년 열린다. 규모는 작지만 큰 의미를 지닌 공간이다. 문화의 수동적인 소비자에서 벗어나 마을 주민들이 직접적인 문화예술의 생산 주체이자 적극적인 수용자의 터전이 되는 새 문화의 발신지다.


이제 마을공동체에 접근하는 시각과 방법이 변해야 한다. 눈에 띄는 변화 보다 보이지 않는 작은 일상들이 소중하다. 그 중심에 있는 것은 결국, 사람이다. 그들이 어떤 마음으로 활동하느냐에 따라 여러 그림이 나오는 곳이 마을이다. 스스로 설 수 있는 사람들이 서두르지 않고 천천히 이웃이 될 때 진정한 마을이 이뤄진다. 서로 다른 사람들이 사는 곳, 마을은 그리 쉽사리 만들어지는 게 아니다. 마을은 시간이 낳은 공동체다.


그렇다면 성미산 공동체와 같은 사례를 확산시킬 방법은 없는 걸까? 결론부터 얘기하면 가능하다. 성미산 공동체를 복제할 수는 없지만, 이런 창의적 공동체가 더 쉽게 형성되고 성장할 수 있는 조건을 마련하고 지원할 수 있다. 마을기업 사업도 이러한 취지에서 시작한 것이다. 자신이 사는 지역에 관한 관심을 조금만 더 갖는다면 모든 것이 가능하다. 한국의 유전자에는 이런 소중한 두레의 유전자가 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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