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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개망 Apr 24. 2023

낯선 길을 따라 걷는 기분

오늘도 걷는다


나는 걷기를 아주 좋아한다. 특히 낯선 거리를 걷는 것이 좋다. 매일 가는 곳도 같은 길이 아닌 다른 길로 걸으면 기분이 새로워진다. 그래서 나는 샛길의 매력에 푹 빠졌다.


뉴질랜드는 땅 면적에 비해 사람 수가 아주 적어서 완전히 시내가 아닌 이상은 고층 건물을 볼 수 없다. 집들의 생김새도 가지각색이라 걸으며 이집저집 훔쳐보는 재미도 쏠쏠하다. 나무집, 벽돌집, 네모난 창, 반달모양 창, 초록색 이끼가 낀 주황색 지붕, 커다란 나무뿌리가 밀어내어 울퉁불퉁해진 보도블록.




지금은 좀 더 외곽으로 이사를 나와서 차로 출퇴근을 하고 있지만 이사오기 전에는 매일 삼십 분 거리를 걸어 다니곤 했다. 봄이면 나무에 파릇파릇 돋아나는 새싹들을 보며 걷고 여름이면 내리쬐는 눈부신 햇살에 눈을 찌푸리며 걷고 가을이면 떨어진 낙엽 위를 바스락바스락 소리 내며 걷고 겨울이면 옷깃을 여매고 어깨를 잔뜩 움츠리며 걸었다.


출근길 어느 골목에서 매일 만나던 턱시도 고양이가 있었다. 처음부터 나에게 한없이 친절했던 고양이는 나한테만 친절한 게 아니어서 종종 내가 지나갈 때 다른 사람의 무릎에 앉아 골골거리곤 했다. 그럴 때면 왠지 남자친구에게 배신당한 여자의 마음이 들기도 했다.


일 년 반 전 직장을 옮기고 나서는 보태닉 가든을 지나 1,800년대에 문을 열었다가 40년 만에 문 닫은 묘지를 지나다녔다. 나는 서양 묘지를 좋아한다. 예전에 프랑스 파리에 갔을 때, 학창 시절 사랑해 마지않던 작가 에밀 졸라의 무덤(그의 시신은 팡테옹으로 옮겨진 지 오래지만)을 보고 감격했던 기억이 난다. 관리가 잘 된 서양 묘지는 조용하고 평화롭다. 천사상이나 왕관 조각상이 올려진 묘비, 알록달록 꽃이 놓인 곳도 있었다. 이제는 없는 사람들의 이름과 그들을 기억하는 사람들이 남긴 글귀를 가만히 서서 찬찬히 들여다보기도 했다.




천천히 걷다 보면 바쁜 삶 속에서는 보지 못한 것들, 듣지 못한 것들을 보게 되고 듣게 된다. 숨이 조금 차올라도 좋다.


매일 다니던 길이 아니라 낯선 길을 걸을 때면 더 신이 난다. 생경한 풍경에서 친숙한 모습을 찾아내기도 하고, 그럴 때면 언젠가 그곳을 지나간 적이 있는 듯한 착각에 빠지기도 한다. 사람의 기억이란 믿을 수 없는 것이어서 언젠가 진짜 지나갔을지도 모를 일이다.


오늘도 걷는다. 요즘 매일 같은 길로 걸었는데 오늘은 지나가다 저긴 뭐가 있지, 했던 샛길로 한 뻔 빠져봐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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