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편. 10화.
여자는 이제 갓 중년에 접어들기 시작한 여성과 계단을 올랐다. 두 사람 사이에는 침묵이 흘렀다. 계단을 오르자 여러 개의 문이 복도를 줄지어 있었다. 여성은 입구에서 가장 멀리 위치한 문으로 걸어가 노크를 했다. 들어오세요. 중후한 목소리였다. 여성은 여자를 돌아보고 눈짓을 했다. 여자는 그게 어떤 의미인지 몰랐다. 들어갈 테니 준비를 하라는 것인가, 아니면 들어가도 되냐는 허락인가. 여성은 문을 열었다.
내부는 상당히 넓었다. 하지만 딱히 여자의 취향은 아니었다. 각종 서류들, 최신 태블릿과 노트북, 먼지 하나 없는 깔끔함. 개미 한 마리 쉬어가지 못할 엄숙함도 포함이었다. 중후한 목소리의 남성은 언뜻 떠올린 이미지와 거의 맞아떨어졌다. 큰 체격과 그 나이대가 그렇듯 불룩 나온 배. 하지만 여느 중년의 남성과는 달랐다. 절제되었고 눈빛은 날카로웠다. 한 치의 오차도 없이 끝을 맞춰 입은 네이비색 정장이 그런 느낌을 줬을지도 모르겠다. 서류를 넘겨 보는 안경테 너머로 결코 흐트러지지 않았을 오차 없는 인생을 엿보았다. 그리고 으레 그런 류가 주는 정확함은 허기가 지는 것을 유독 못 견뎌했다. 그 옆에 선 자신조차도 끝없이 배고픈 지를 확인했다. 그럴 거라는 막연함만으로도 당장 눈앞에 있는 것에 손을 뻗었다. 그럴 때면 늘 배탈이 났다.
"곧 돌아오겠네. 그거 밥이 안 될 텐데 왜 안 될 일을 사서 하지? 말릴 의도는 없어요. 다만 궁금해서."
여자는 말없이 웃었다. 뭐, 나가봐요. 잘 다녀오고. 여자는 진심을 다해 인사를 했다. 그간 감사했던 것은 사실이었으니까. 사무실로 내려오는 내내 그 말이 마음에 박혔다. 문득 내가 이 선택을 후회하면 어쩌나 하는 불안이 엄습하기도 했다. 하지만 확신과 당연함으로 가득 찬 기대를 누르기에는 역부족인 말들이었다. 사무실 직원들과 인사를 했고 책상을 정리했다. 일 년간의 회사생활은 여섯 시를 바라보는 허공에 뜬 시간들이었다. 세상의 모든 경험에는 실패가 없다. 동감하는 말이었다. 이곳에서의 생활도 얻어가는 것은 분명 있었다. 내가 속할 곳이 이곳은 아니라는 확신. 이제는 떠나야 한다. 여자는 건물을 나왔다. 그녀의 눈앞에 포장도로가 펼쳐졌다. 여자는 몸을 돌렸다. 이제는 때가 되었다.
여자는 맨발로 가시투성이의 좁은 길을 걸었다. 한걸음을 내딛는 게 너무도 버거웠다. 걸을 때마다 가시에 찔렸고 심지어 뚫리기까지 했다. 피가 점점 흥건했다. 도저히 안 되겠다 싶을 때에는 빽빽한 가시 틈 사이 아주 작은 공터에 까치발을 들어야 겨우 쉴 수 있었다. 그러면 또 놀랍도록 발은 아물었다. 여자는 발을 들여다보았다. 벌써 대여섯 개의 큰 흉터들이 눈에 띌 정도였다. 여자는 주위를 둘러보았다.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 암흑이었다. 상당히 좁은 길이라는 것, 한 치 앞밖에 볼 수 없다는 그 사실만큼은 명확했다. 그 한 치 앞이 온통 가시 투성이라는 것 또한. 간절함의 여부는 도움이 되지 않았다. 여자가 본래 원했던 길은 결코 열리는 법이 없었다. 여자는 저절로 한숨이 나왔다. 이 길의 끝이 과연 있기나 할까. 여자는 울적해졌다. 들이는 노력에 비해 앞으로 나아가지 않는 기분이었다. 아무리 피를 흘려도 세상은 온통 암흑이었고 길은 온통 가시밭이었다. 낭비였다.
왜 그랬는지 모르겠으나 여자는 탄원했다. 소리는 지르지 않았다. 다만 억누르지 못한 눈물로, 한숨으로, 위를 올려다 봄으로 갈구했다. 원망스러웠다. 자신의 존재 자체가, 이렇게 생겨 먹은 것이 안타까웠다. 어디서부터 잘못된 것일까. 일생의 어느 한 부분이 이토록 큰 파장을 불러왔던 것일까. 여자는 귀를 닫지 못했던 자신이 미웠고 이 모든 불완전성을 보면서도 나아갈 수밖에 없는 끌림이 못내 서글펐다. 이리로도 저리로도 갈 수 없었다. 다만 자리에 가만히 서서 피를 흘려야 했을 뿐이다.
그때였다. 땅이 진동했다. 대지가 하나의 케이크 단면처럼 파내어졌고 공중으로 들렸다. 알 수 없는 힘이 가해지고 일순간 땅이 뒤집혔다. 여자가 발 붙인 땅은 아래로, 땅 저 아래에 있는지도 몰랐던 세상은 위로 향했다. 어안이 벙벙했다. 여자는 여전히 가시밭길에 붙어 있는 채로 뒤집혀 있었다. 혼란이 가시자 그제야 여자의 눈이 밝혀졌다. 여자는 뒤집힌 땅 반대편의 세상을 보았다.
갈라진 대지 사이를 뚫고 덩굴은 장미를 피웠다. 얼마나 오랜 시간 동안 비가 오지 않았는지 예상이 가는 가뭄. 메말라 비틀어져 가는 땅 사이를 힘겹게 뚫고 덩굴이 모습을 드러냈다. 갓 피어난 장미는 어떤 색도 띠지 못했다. 몇 송이 피지 못한 장미는 갖은 힘을 내었다. 산모가 주는 영양분을 빨아들이는 태아처럼, 젖을 물린 아이처럼. 끌어당길수록 장미는 붉게 물들었다. 선혈의 빛깔이 영롱히 피어났다. 그 빛깔만큼은 세상의 모든 꽃보다 밝고 환했다. 별들이 눈을 감았다. 해 또한 머리를 묻었다. 경탄과 수치의 뒤범벅이었다.
여자는 길을 걸었다. 여전히 가시는 발을 찔렀고 앞은 보이지 않았다. 그러나 여자는 묵묵히 길을 걸었다. 여자는 더 이상 소리를 듣지 못했다.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그 작은 탄원들이 귀로 흘러가지 않았다. 다만 귀로 듣던 것을 이제는 눈으로 볼 줄 알았다. 여자는 계속 걸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