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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가하 Feb 10. 2024

[번외] 설날에는 비프부르기뇽

 설날 당일에는 늘어지게 늦잠을 잔다. 눈뜨면 옆자리에 누워있어야 할 사람은 자기 본가에 내려갔고, 나는 살짝 한기를 느끼며 잠옷에서 일상복으로 갈아입는다. 소고기 뭇국과 참치 스크램블 에그, 그리고 김치를 내어 혼자 느긋하게 아침을 먹는다. 국물이 말라붙은 자국이 끈적하게 남아있지만 그릇만 설거지통에 집어넣고 식탁은 닦지 않는다. 아끼는 머그컵을 꺼내 커피를 내리고, 가장 좋아하는 소파 자리로 간다. 오늘 읽을 책(아침 그리고 저녁)과, 독서 쿠션과, 연필이 항상 놓여있는 곳으로.


 커피가 천천히 식어가는 것을 느끼며 책을 읽다가 "그리고 커피 살 돈이 되면 집에 커피도 있어야 했다"라는 문장에 밑줄을 친다. "빵을 도마 위에 올려놓고 빵칼로 한 조각을 잘라내어 버터를 듬뿍 바르고는 같은 칼로 브라운 치즈를 두툼하게 잘라낸다"라는 문장을 읽으면서는 브라운 치즈의 맛에 대해 상상해 본다. 버터 바른 빵 대신, 나는 무화과 쿠키를 오도독 씹으며 커피를 마신다. 책의 거의 끝부분에 이르러 "자네가 사랑하는 건 거기 다 있다네, 사랑하지 않는 건 없고 말이야"에서 눈물을 찔끔 흘린다. 두 시간 정도 지났으니 커피는 완전히 차가워졌고, 나는 옮긴이의 말까지 다 읽고 나서 책장을 덮는다. 책이 주는 여운과 고요하고 온전한 충만감에 휩싸여, 오늘 나의 설날은 시작부터 안녕하다.

 이렇게 평온한 설날 아침을 맞이하기까지, 나는 많은 시행착오를 겪었다. 우리가 분명히 '정상적인 가족'의 범주에 속했다면, 명절을 즐겁고 따듯하게 보냈을 테지만, 나는 일 년 중 명절이 가장 힘들고 우울했다. 가난한 아버지의 체면치레를 위해 엄마와 세 딸의 노동력이 동원되고, 차례를 준비하면서도 사사건건 시비가 붙어 우리 가족은 늘 전쟁처럼 싸웠다. 아무도 행복하지 않은 명절. 할머니 할아버지 귀신도 이런 차례상은 받고 싶지 않을 걸, 나는 혼자 코웃음을 치는 여자애였고, 우리 집은 아들이 없어 제사를 물려받을 사람이 없다. 내가 아들이었어도, 제사는 물려받지 않을 것이다. 결혼을 앞둔 동거인에게도 이야기해 두었다. 예비 시어머니 시아버지, 결혼 안 한 누나 생일은 챙겨도 남의 집 조상님께 절은 하지 않을 거라고. 어느 한쪽이 억울해지고 피곤해지는 일을, 나는 하고 싶지가 않다.


 책을 다 읽고 나서는 연중무휴 식자재 마트(설날에도 수고 많으신 직장인들!)에 다녀왔다. 소고기와 셀러리, 양송이버섯과 당근, 양파랑 감자, 무염 버터도 샀다. 소고기를 재울 레드와인은 집에 늘 있으니 사지 않는다. 이 글을 다 쓰고 나면 비프 부르기뇽을 만들 생각이다. 비프 부르기뇽은 프랑스식 갈비찜인데, 요리 영화 <줄리앤줄리아>에서 보고 나서, 언젠가 꼭 한 번 시도해 봐야겠다고 생각했었다. 와인에 졸인 소고기라니, (소에겐 미안하지만) 너무 낭만적이지 않은가? 작년 연말에 동거인의 부모님과 누나에게도 해드렸는데 반응이 좋았다. 이번엔 우리 집 식구들에게 해줄 차례다. 내일은 친정 부모님과 언니네 가족들이 집에 놀러 오기로 되어 있다. 동거인은 내일 식사 시간에 맞춰 올라오기로 했다.   


 영화 속 '줄리'와 '줄리아'라는 두 여인은 요리를 통해 잃어버린 자아를 찾아가는데, 어쩐지 나는 반대인 같다. 양가 어른들께 심려를 끼쳐가며 자아를 충분히 챙기고 있으니, 이제는 가족들을 챙길 차례이다. 설날에 늘 의무처럼 먹는 산적이나 생선전 말고, 새로운 프랑스 요리를 먹으며 새로운 설날의 풍경을 만들어가고 싶다.  


그림(좌) 일러스트레이터 우은호님 작품 출처 : https://blog.naver.com/didqkddjs89/22176167739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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