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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가현 Jul 04. 2023

번아웃이 이토록 무서울 줄이야

롤러코스터보다 더한 감정의 기폭

번아웃(burnout)
어떠한 활동이 끝난 후 심신이 지친 상태

***

솔직히 말하자면, 로판을 쓰면서 번아웃을 겪은 적은 없었다.


로판을 쓰고서 완결이 나면 머릿속을 꽉 채우던 상상과 생각을 완전히 비워내서, 더 이상 어떤 스토리를 써야 하나 고민하지 않아도 되는 상황이 엄청난 성취감으로 다가왔다.

여성향 로판이든 남성향 현판이든, 웹소설에서 판타지라는 장르는 주로 사건위주로 스토리가 구성된다. 다만, 로판의 경우에는 여성향이 강하기 때문에 주인공의 감정(대게는 로맨스이지만, 그 외에도 수많은 감정들)이 50%, 사건이 50%의 비중을 차지한다.

동양풍 로판과 역사 로판만 써온 지난 8년 동안, 오히려 캐릭터에게 내가 빙의돼서 머릿속에 존재하는 세계관에서 온갖 다사다난한 사건을 겪는 게 재미있던지라, 작가나 배우들이 왜 작품이 끝나고 번아웃을 겪는지 잘 몰랐다.


2022년은 여러모로 내 평생 기억에 남을 해였다. 인생의 불행이 밀려와도 이렇게 지독하게, 한꺼번에 몰아서 들이닥친 시기였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새로운 시도를 해본 해이기도 했다.


아직 뜨지 않고, 유명하지 않은 웹소설 작가의 가장 큰 장점은 이 장르, 저 장르, 이것저것 써봐도 된다는 것이다. (아마 나의 다음 작품은 19금 현대로맨스가 되지 않을까 싶지만, 그건 우선 지금 쓰고 있는 작품부터 완결내고......)

어쨌든, 아는 지인 pd님으로부터 현로(현대로맨스)를 써달라는 제안을 받았고 생애 처음 순수 로맨스에 도전해 보았다.


'내 삶을 망친 구원자.'


이게 내가 처음 쓴 현대로맨스 작품이었다.

처음에는 즐거웠다. 어렸을 때 처음 가진 꿈이었으나, 머리가 따라주지 못해 일찌감치 포기해야 했던 '검사'가 내 여주의 직업이었다. 그리고 남주는 조직에서 비롯된 기업의 후계자. 얼마나 멋진 캐릭터들인가.

맨날 사극톤의 대사와 풍경만 쓰다가 현대물을 쓰다 보니 적어도 내가 현대에 살고 있다는 생각은 강하게 들어서, 이 세계에 속한 기분으로 스토리를  쓸 수 있어 좋았다.

그러나 세계관과 달리 플롯 구성에서 애를 먹었다.


로판과 달리 현대로맨스는 100% 감정으로 이루어진다. 사건은 약간의 조미료 같은 느낌이랄까. 그래서 감정의 변화만으로 70화를 끌고 나가려면 감정을 아주 세밀하고, 미세하게, 그러면서 스토리가 진행될수록 감정도 점점 클라이맥스로 치닫게끔 설계해야 했다.

그 과정에서 나는 글을 쓰면서 혼자서 그 감정들을 표현해보기도 하고, 대사를 중얼거려보기도 했다. 그러다 보니 소설을 쓰면 쓸수록 캐릭터 감정에 동화되어 갔다. 그리고, 끝으로 갈수록 내 감정이 소설에 쭉쭉 빨려서 갉아먹혀 들어간다는 생각이 들었다.

2022년 8월 31일. 처음으로 도전해 본 현로를 마치고 편집자님한테 보냈다. 근데, 이상하게 예전처럼 짜릿한 해방감이 들지 않았다. 메일을 보내고 2시간동안 의자에 앉아 흰 벽을 보며 멍 때렸다.

나는 그게 감정을 하도 쓴 탓에 아무것도 느낄 수 없게 감정이 무뎌진 줄 알았다.

그러나 그건 무뎌진 게 아니라, 미친 듯이 예민해져 있던 상태였다.


평소 같으면 '좋다.'정도로 느낄 감정은 '미친 듯이 행복하고, 세상 이렇게 좋을 수가 없다!!!'로 느꼈고, 반대로 '슬프네.' 정도의 감정은 주변 사람들이 다 쳐다볼 정도로 미친 듯이 펑펑 울어내며 표출했다.


극과 극을 달리는 감정의 번아웃은 마치 롤러코스터를 탄 것처럼 나를 매시간 뒤흔들어 놓았다. 솔직히 9월 한 달간은 내 감정에 멀미가 날 정도였다.

이래서 배우들이 작품 끝나고 번아웃이 오는구나 싶었다. 무엇보다 감정의 번아웃은 해결책도, 약도 없어서 정말 벗어나는 데 아주 오랜 시간과 노력을 기울여야 했다. (사실 지금도 완전히 벗어난 것 같지는 않지만..)

아직까지는 감정에 대한 확실한 해결책을 못 찾고 있는데, 다른 작품을 쓰면서 조금씩 해소는 되는 듯하다.


뭐, 내가 좀 더 많은 웹소설을 쓰고, 좀 더 많은 캐릭터를 접하면서 무디게 살아가야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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