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민함을 갖춘 베짱이, INTJ의 다이어트
변화, 성장, 발전, 세상에 이 단어들만큼이나 매력적인 단어가 또 있을까. 진부하다 느끼는 당신이 꼭 알아야 할 게 있다. 이런 단어를 가장 사랑하는 나는 놀랍게도 게으름 피우기 대회의 1등을 거머쥘 자신이 있는 게으름뱅이라는 사실이다. 여태까지 휘게세끼 #1,#2편을 읽은 독자라면 알겠지만 "귀찮아"라는 말을 하루에도 다섯 번에서 많게는 열 번 정도는 한다.
돌려 말하는 데는 소질이 없다. 그런 시간적, 감정적, 에너지적 효율 낭비를 하느니 차라리 입을 다물고 그런 사람으로부터 멀어질 수 있는 방법에 대한 에세이 또는 위인전, 자기 계발서를 읽고, 관심 있는 분야의 온라인 강의를 결제해서 한 편이라도 더 보겠다.
나는 내 예민함을 참 좋아한다. 애증의 관계였지만 올해 들어서는 내 귀중한 재산으로서 받아들이고 제법 사랑해주고 있다.
예민하다는 것은 그만큼 관찰력이 좋아서 다른 사람들의 감정과 변화에 민감하기 때문에 정작 본인들이 알아차리지 못한 면까지 쉽게 알아차릴 수 있고, 특히 아주 작은 변화라도 생길 때면, 반응속도가 빠르고 적응도도 높은 편이라 트렌드를 잘 읽고 상황 맥락과 어떤 흐름이든 흐름을 잘 읽을 수 있으며, 그 덕에 눈치가 빨라서 센스가 있고 감각적이고 감성적이라는 것을 의미한다. 또한 위기를 대처하고 모면하는 능력과 정확하고 빠른 판단력을 갖출 수 있다는 것도 내포한다.
이런 '게으름' 덕분에 다이어트에도 성공하고 유지할 수 있었던 거라면 믿겠는가?
그런 특성 덕에 다이어트도 크게 어렵지 않게 즐기면서 하고 있다. 과정 속에서는 어려운 점이 꽤 많았지만, 경험치 (다이어트에 대한 데이터베이스, 기본지식 등)이 쌓여가면서 점차 나한테 맞는 방향으로 즐겨가면서 하고 있다.
루틴(routine), 이 얼마나 효율적이고 아름답고 매력적인 체계인가! 특별한 노력 없이, 어떤 의지를 가져야만, 해내야 한다는 또는 해내고 말겠다는 의지력이나 동기부여가 전혀 필요 없이 자연스럽게 행동하게 되는 시스템이라니! 그야말로 '개이득'이다.
좋은 습관, 좋은 루틴을 들여놓는다면 자연스럽게 모든 것이 내가 원하는 방향대로 흘러가기가 쉽다는 걸 의미하기도 한다.
아침에 늦게 일어나거나 일이 생겨서 밥시간이 늦어지게 되면 전체적인 루틴이 흔들리고, 계획을 수정해야 해서 그게 싫어서 저녁에 미리 아침에 10분 이내의 아주 간단한 조리만 하면 바로 먹을 수 있도록, 준비해두고 자는데, 어젯밤에는 딱히 끌리는 메뉴도 없고, 마음속으로 아주 간편한 #훈제오리 김치 쌈밥을 먹을까 하고 생각만 해두고 잤는데 아침에 일어나 보니 어제저녁에 가족들이 먹고 남은 닭볶음탕이 있길래 운동을 더하고 이걸 먹는 게 효율적이고 행복하겠다 싶어서 아주 오랜만에 집밥을 먹었다. 그리고 점심에도 먹었다.
어린잎채소 20g, 닭볶음탕 고기 150g (뼈 무게 포함), 버섯 50g, 호박전 2개, 닭볶음탕 국물, 잡곡밥(렌틸콩, 귀리, 검정찹쌀보리, 흰쌀, 현미찹쌀) 130g
물을 한 컵을 붓고 나서 끓이면서 한 컵 반을 부었는데도 감자랑 양파, 고기가 국물을 빨아들여서인지, 고기에는 간이 완벽히 베어 들었는데, 국물이 많이 짜졌다. 빅뱅이론을 보면서 혼자 먹기 시작해서 감자 한 개 중에 일부만 내 그릇에 담고 국물과 나머지는 엄마 그릇에 담았는데, 식을까 봐 얼른 드시라고 해서 엄마도 대각선으로 마주 앉아서 같이 먹었다. 엄마는 밥, 계란말이, 배추김치, 감자와 닭볶음탕 국물과 함께 식사를 하셨고, 별다른 대화 없이 각자 밥을 먹었다. 오늘 식사에서는 이미 탄수화물을 아침 점심으로 든든히 채워줬으니, 저녁에는 오랜만에 채소가 듬뿍 들어간 샐러드를 먹어야겠다. 일반식을 두려워하는 다이어터와 유지어터가 많은데, 이렇게 구성해서 먹으면 건강하고 맛있게 집밥을 즐길 수 있다! 일단 해볼 것! 다이어트는 내 몸에 하는 실험과도 같다. 데이터베이스가 쌓여야 내 몸에 대해 더 정확히 파악할 수 있고, 과식과 폭식의 굴레에서 벗어날 수 있다. 짜게 먹었으니 일단 물을 많이 마셔줘야겠다. 이런 대처법이나 노하우도 경험해야만 깨달을 수 있다. 일단 부딪혀라!
3시 16분쯤부터 2시간 동안 친구랑 통화하면서 다음 주 약속에 대한 이야기를 나누고, 기분 좋은 상태에서 아빠 오시기 전에 성질 급한 새우가 죽기 전에 회로 먹었다. 달짝지근하니 씹는 맛도 좋은 생대하회는 언제 먹어도 끝내주게 맛있다. 한 번도 못 먹어봤다면, 꼭 먹어보길 추천한다. 머리와 꼬리, 내장을 제거하고 몸통 부분을 고추냉이를 섞은 회간장에 찍어먹으면 헤븐~ 입 속이 천국이 된다.
삼시 세 끼를 모두 일반식으로 먹다니! 짜릿하다. 재밌다! 일반식을 먹으면서도 이제 어느 정도 나만의 가이드라인이 생겼다. 그래서 양 조절도 할 수 있다! 평소보다 약간 많이 먹은 것 같긴 하지만, 덕분에 저녁 운동할 힘이 막 솟아서 기분 째진다!
그리고 저번부터 느낀 건데, 어릴 때와 달리 지금은 광어 우럭회보다는 생선구이나 대하찜 같은 고소 하거나 달짝지근한 맛이 있는 해산물을 더 선호한다. 회도 전어회나 밴댕이회 같은 회가 더 맛있게 느껴진다. 광어회나 우럭회는 육질 맛은 있을지 몰라도 특유의 끌리는 맛이 없다. 이전엔 몰랐던 취향인데, 식단 기록이 이런 게 재밌다.
매일 꾸준히 기록하기만 하면, 살도 빠지고, 적정체중을 유지할 수도 있고, 몰랐던, 혹은 생각해 본 적 없던 취향을 세세하게 알 수 있다는 게 얼마나 큰 이득인가.
그리고 이제는 일반식을 먹을 때 자연스럽게 채소를 챙긴다. 쌈채소가 있었으면 쌈을 싸서 먹었을 텐데 쌈채소가 없어서 아쉬웠다. 당근이랑 회 조합이 생각보다 잘 어울렸다. 당근이 달달해서 잘 맞았던 것 같다. 초장은 당질이 높다고 해서, 또 최근 취향으로는 간장에 찍어먹는 게 더 맛있어서 대하찜 외에는 회간장에 찍어먹었다. 회가 내 스타일이 아니어서 생각보다 만족도가 높진 않았지만 아주 오랜만에 하루 종일 직접 요리하지 않고 집밥으로 먹었다는 것에 뿌듯하고 한 걸음 성장했다고 느꼈다. 오랫동안 직접 요리해 먹으면서 다른 사람이 해주는 일반식에 대해서 약간의 두려움과 강박이 있었는데 이제는 그것이 완전히 깨져가는 과정에 놓이게 됐다는 걸 깨달았기 때문이다. 어떤 상황에서든 이젠 충분히 다이어트할 수 있다. 부모님과 아주 오랜만에 같은 메뉴로 마주 앉아서 먹었는데 역시 혼자 먹을 때만큼의 만족도를 가져다주지는 못하는 것 같다. 이야기가 관심사가 아니고 어른과 이야기해서인지 빅뱅이론을 보면서 먹을 때가 더 좋다는 생각을 했다. 역시 불편하다는 생각이 가장 컸다.
독립적이고 진취적이고 계획적이고 치밀하며, 예민하고 민감한 사람. 그게 나다. 사회는 그런 내게 이상하다, 특이하다, 까탈스럽다, 까칠하다란 프레임을 자주 씌운다.
그래서 내가 "평범함"이라는 범주에 들어가야만 하는 줄 알았다. 그래서 내 예민함을 없애려고 부단히도 애를 쓴 적도 있었고, 한 때는 혐오에 가까운 감정을 가진 적도 있었다. 그러나 이제는 예민함이라는 특별한 재능을 가졌다는 것에 행복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