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라는 작은 감옥
여행 경로가 늘 그러하듯 두서없게 캐나다 국경을 넘게 되었다. 아마 여행 내도록 내일은 어디 가지를 고민할 것 같다. 원래 여행 계획은 100일간의 중미, 남미 여행이었으나 싼 비행기 티켓을 찾다 보니 칸쿤 in 상파울루 out의 계획이 나왔다. 특히 상파울루 아웃 비행기는 뉴욕 경유가 있었고, 천조국의 심장을 방문하려 스탑오버를 해보려고 ua항공 홈페이지를 뒤적이다 보니 샌프란시스코 경유도 있어 포함하게 되었다. (출발 7일 전이었는데, 당시 ua사태가 한참이었는데 친구들과 끌려나가는 연습을 해 보기도 했다. 하지만 예상대로 별일은 없었고 밥도 꽤 괜찮게 나왔던 것 같다.) 샌프란시스코-뉴욕-쿠바가 경로였으나 나이아가라를 보고 싶어 했던 l의 뜻에 따라 나이아가라를 방문하기로 했다. 그러다 뉴욕과 나이아가라의 중간에 유학 중인 대학 동기가 있다는 것이 떠올라 친구를 방문하고 나이아가라 온타리오/캐나다 지역을 방문하게 되었다. 캐나다에 온 것은 쿠바 입국 시 필요한 여행자카드를 파는 공항들이 있는데 뉴욕을 거치는 항공기에서는 ua항공에서 75달러에 판다는 흉흉한 소문을 들었고, 이에 비해 캐나다 항공에서는 공짜로 뿌린다는 혜자스러운 소문이 있었기 때문이었다.(물론 포함된 가격이겠지만 상대적으로 훨씬 쌌다. 나머지 공항중에서는 칸쿤 공항이 가장 쌌다고 들었다. 25달러) 결국 샌프란-뉴욕-나이아가라(온타리오 캐나다, 토론토)-쿠바 하바나-멕시코 칸쿤-중간미정의-상파울루 out의 경로가 되어버렸다. 정해진 경로를 빠르게 움직이다 보니 칸쿤에서 길게 한숨 돌려야겠다는 생각이 있을 뿐이다.
숙소도 캐나다지역이 쌌기 때문에 그레이하운드를 타고 캐나다 지역으로 넘어가게 되었다. 하루 캐나다를 넘어가는 순간 좀 더 차갑고 정제된 느낌의 미국식 건물들이 더 띄엄띄엄 지어져 있었다. 다행히 새벽에 도착한 숙소에서는 고맙게도 문을 여는 즉시 체크인을 해주어 푹 쉴 수 있었다. 미국식 하이웨이 드라이빙 inn 같은 구조의 숙소는 널찍하고 깔끔했고 복도 없이 바로 밖으로 나오게 되어 있었다. 큰 나라에서 자동차로 이동하며 머무르는 숙소들을 영화에서 자주 보았는데 딱 그런 숙소라 기분이 묘했다. 방은 매우 넓었고 깨끗했고 온풍기를 틀어야 했다. 넓고 기본에 충실한 좋은 숙소였다. 지금 생각해 보면 캐나다로 넘어가 본 것은 꽤나 좋은 선택이었던 것 같다. 단 하루로 느낄 수 있는 게 뭐가 있을까 싶었지만 1박 2일로 느낀 캐나다는 조용하면서도 상쾌한 기분이었고, 꼭 다시 돌아와 보고 싶었다. 이왕이면 좀 더 위쪽 추운 곳으로.
나이아가라 온타리오 그레이하운드 정류소에서 숙소 쪽으로 가는 길은 생각보다는 번화하지 않았다. 하지만 누가 봐도 그림같이 지어진 집들이 나이아가라 폭포 쪽으로 가는 길에 펼쳐져 있었고 반대쪽으로는 깊숙이 나이아가라에서 내려오는 물줄기가 신비로운 초록빛으로 빛났고 다리 건너편은 미국지역이 보였다. 결국 두 번 이용하게 된 유일한 스낵바 정도의 레스토랑에서는 동네 노인들이 모여있었고, 음식은 꽤 괜찮았다. 숙소도 그렇고 이 레스토랑도 오전에는 연세가 드신 여성분이 그리고 조금 더 지난 시간에는 젊은 여성이 서빙을 하는 것이 꽤나 인상적이었다. 편안한 분위기였다. 토스트와 오믈렛과 계란의 굽는 정도 베이컨의 굽는 정도까지 많은 주문을 해야 하는 어려운 일이었지만 침착하고 친절하게 진행해 주었다. 같은 달러 명칭을 쓰면서도 4/5 정도라 왠지 싼 느낌도 들었고, 어떤 면에서는 유사미국 답게 칼로리가 높아 아주 오랫동안 든든했다.
나이아가라가 눈에 처음 들어오는 순간 나는 조금 염려스러웠다. 생각보다는 크지 않은 규모였다. 물론 가까이 다가가면 훨씬 큰 규모이겠지만 태풍이 불 때 보았던 제주도의 해안가들보다 에너지가 더 대단할지는 의문스러웠다. 그러다 좀 더 걸어가다 보니 또 하나의 더 큰 폭포가 보였다. 규모는 더 대단해 보이긴 했지만 폭포수가 떨어지는 힘보다는 큰 그림 속에 두 폭포가 이루는 있는 구도가 꽤 괜찮아 보였다. 좀 더 가까이 다가선 나이아가라는 캐나다와 미국을 넘나들며 가까이와 멀리서 여러 각도로 바라볼 수 있게 되어 있었다. 특히 보트를 타고 나이아가라에 가까이 다가섰을 때는 대단한 에너지를 느낄 수 있었다. 물방울이 정신없이 튕겨 나와 눈을 뜰 수 없었지만 엄청난 소리와 간간이 보이는 폭포수 상단의 모습과 폭포로 밀려나지 않기 위해 시동을 켜 두었지만 제자리에 멈추어져 있는 보트의 밀당이 인상적이었다. 꽤 오랜 시간 큰 폭포 가까이에 머물렀고 몇몇 순간 엄청난 에너지에 소리를 지를 수밖에 없었다. 개인적으로 이런 정신없을 정도의 에너지를 좋아한다. 그럴 때면 마음 저 깊숙이에 있는 무언가를 강제로라도 털어낼 수 있는 것 같은 기분이었다. 물론 그러고도 오랜 여운과 다양한 변화를 더 느끼기를 원하는 사람이지만 말이다.
나이아가라 부근에는 유명한 관광지가 다 그러하듯 다양한 나라의 사람들이 와 있었다. 그러다 보니 한국사람들도 많이 볼 수 있었다. 말을 하지 않더라도 옷차림이나 생김새 등으로 한국사람들은 금방 알아볼 수 있다는 것이 신기했다. 아직 한국인을 은퇴하지 않았는지 미묘하게나마 중국인이나 일본인과는 달랐다. 그러다 약간 이상한 한국말을 들을 수 있었다. 한 무리의 중년여성들이었는데 너무 정확한 서울말을 구사하고 있으셨다. 투머치토커처럼 영어발음이 섞인 한국어는 전혀 아니었다. 한국에서 사시다 미국이나 캐나다에서 오래 사신 분들이 아닐까 짐작할 수 있었다. 마치 오랜 시간 한국어의 미세한 변화가 업데이트되지 않아 정확한 억양에도 뭔가 지금의 한국어와는 다른 느낌으로 다가오는 그런 말이었다. 아마 이런 생각을 구체적으로 할 수 있게 되었던 것은 유학을 온 친구 h와의 만남 때문이었다.
오랜만에 만난 친구 부부는 대학이 위치한 조용한 곳에 살고 있었고 너무 오랜만에 만나는 어색함을 지워주듯 환대해 주었다. 간이 아주 좋았던 한식도 여행의 피로를 덜어주었다. 무엇보다 여전히 여러 가지가 긴장되기는 했지만 아주 먼 곳에서 오랜 친구를 보는 것은 참 좋은 일이었다. 사람사이에 끼는 것을 좋아하지도 잘하지도 못해 염려했던 내 마음이 부끄러워질 정도였다. 1박 2일 동안의 짧은 일정이었지만 나는 그의 삶이 궁금해서 이러저러한 이야기를 물었고 좀 더 정중했지만 그도 그랬던 것도 같았다. 가끔 그는 미국 시골에서 지내는 유학생 생활의 어려움을 이야기했고, 가끔씩 쓸쓸한 기색을 내 비추기도 했다. 내 기억으로 h는 나와는 달리 점잖고 멘털도 튼튼했던 친구로 기억하고 있어 조금 놀라긴 했다. 멘털을 유지하는 것이 쉽지 않다는 그의 말이, 특히 미국이라는 지나칠 정도로 자유로운 나라에서 10년 가까이, 지금은 강의도 맡고 있는 그가, 그리고 꽤나 미국식 음식이나 문화를(권위적인 한국문화와 대조된다는 차원에서의 큰 분류에서) 좋아하는 그가 느끼는 어려움이라는 것이 나는 궁금했다.
아주 간단히 이야기하면 많은 사람들이 이야기하듯 한인 커뮤니티 내에서의 어려움이라 보면 이해하기 쉬울 것 같았다. 하지만 그 어려움이라는 것을 근본적으로 따져보면 그가 미국의 다른 어떤 문화에도 마음 깊이 접속할 수 없었다는 데에 있다고 보였다. 여행하는 입장에서 보기에 영어와 미국식 문화에 매우 익숙하더라도 태어날 때부터 오랜 시간 형성된 언어적 문화적 장벽을 넘는다는 것이 결코 쉽지 않을 것이다. 그러다 보니 결국은 누군가와 교류할 수 있는 한인사회가 중요해질 수밖에 없어진다는 것이었다. 그런데 그 한인 사회는 어느 순간 모국의 문화변화에도 접속하지 못하게 되는 것이 중요해 보였다. 아마 생활공간이 차이가 나기 때문일 것이다. h는 어느 순간 한국드라마가 재미가 없어지더라는 얘기를 했다. 가만히 생각해 보니 그럴 만도 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한국드라마나 예능과 함께 생활공간/환경을 같이하며 나아가지 않기 때문일 것이다.
문화는 물질적 조건 못지않게 인간의 삶의 결을 형성한다. 혹은 그 속에서 살 수 있도록 한다. 6년 전쯤 중국 여행을 하며 중국인들이 주로 이용하던 10시간가량의 침대 버스를 탔던, 아니 누웠던 기억이 있다.(그 버스는 광저우에 간다고 했는데 광저우 톨게이트에 나를 내려주고 친절하게 택시기사를 대기해 두었다. 물론 택시비는 많이 나왔지만 살아 친구집에 돌아갈 수 있었다.) 당시에도 너무나 많은 중국인들이 미국이나 각지에 유학을 가 있었고 그곳의 문화를 습득할 수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침대 바로 앞에서 방영되던 영화들은 hd화질에 70년대 정서의 그런 것이었다. 다수의 사람들이 느끼는 정서의 결에서 벗어난 작품을 만들기는 쉽지 않다는 것이다. 한국 문화 콘텐츠가 의외로 힘을 발휘하는 부분은(아시아 권뿐만 아니라 여러 나라, 쿠바에서도 한국드라마를 봤다는 박물관 직원을 보기도 했다. 쿠바에서는 핸드폰 에어컨 냉장고 등 여러 삼성, LG제품들이 팔려나가고 있었다) 아직 완전히 서구적 정서에 도달하지 않은 많은 개도국 중진국 문화권들이 가지고 있는 어떤 정서에 접속할 수 있기 때문일 것이다. 적당한 가족주의, 도덕주의, 자극적이고 강렬한 드라마타이즈, 그에 비해 안정적이고 세련된 기획 연출력 정도일 것이다. 계산적이고 세련되게 만들어졌지만 자극적이고 약간은 위선적인 문화 콘텐츠. 쿠바에서 트리니다드에서 만난 호주인 빌은 왜 한국드라마는 언제나 affair냐고 웃으면서 얘기했고, 그건 북한의 미사일 같은 거라고 농담 삼아 얘기했던 기억도 있다.
그의 이야기가 내게 흥미로웠던 것은 사람들은 언제, 왜 굳어버리는 것인가 하는 것에 대해 인사이트를 주기 때문일 것이다. 뉴욕의 어느 지하철 역에서는 왜 박정희와 이승만의 사진이 붙어있고, 칸쿤의 중국 음식점에는 진지하게 마오의 사진이 붙어있는가 하는 것이다. 태극기 집회를 열성적으로 참여했던 할아버지는 어느 순간 과거에 멈추버렸는가 하는 것이다. 궁극적으로는 우리들 역시 마찬가지일 것이다. 교민사회의 예는 사람들이 굳어가는 과정에 대한 짧은 실험 공간 같은 것일 수도 있을 것이다. (물론 나름의 문화가 생겨나고 있는 것으로 보아야 하겠지만 사회규모가 작을 때의 문화는 또 나름의 전통사회적 특성을 띄기도 할 것이다.) 사람들은 어느 순간 한 사회와 접속점을 잃어버린다. 때로는 자신도 모르게 끊어져 있고 끊어 버리는 경우도 있을 것이다. 나도 모르게 이러저러하게 많은 생각들이 이어져 나가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