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이지 않아 보게 된 세상 #5
Chapter5. 졸업... 추억으로 미래를 사다.
만남은 헤어짐을 전제로 한다. 다만 ‘헤어짐’이란 무언가의 끝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
한국시각장애인 복지관 보행훈련의 마지막은 혼자의 힘으로 명동에 다녀오는 것이었다. 강동구 상일동역 부근에 있는 한시복에서 명동역 명동성당까지 왕복. 말만 들어도 쉬운 일이 아니란 것이 느껴졌지만, 출발 전 머리속으로 그려본 나의 이동경로는 로빈슨 크루소가 무인도에서 영국까지 그려본 항로에 견주어도 손색이 없는 난해함을 지니고 있었다.
일단은 죽이든 밥이든 또는 탄 밥이든 무엇이 되어도 좋다는 심정으로 흰지팡이를 들고 안대를 착용하고 길을 나섰다. 복지관에서 상일동역까지는 보행 연습 중에 많이 다녑보긴 했지만, 한순간이라도 정신줄을 놓으면 엉뚱한 곳을 향해 하염없이 걷게 되는 것이 눈에 뵈는게 없는 이들의 단점이다. 그러다 보니 몸으로 느껴지는 태양의 방향, 자동차의 진행 방향 소리, 바닥에서 느껴지는 감각 등을 느끼기 위해 온 신경을 기울이며 걸어간다. 보통 사람이라면 10분이면 갈 수 있을 거리를 삼십분도 넘게 걷게 되는 것 같다.
그렇게 온 모의 신경세포를 활성화시켜 역까지 도착하고 나면, 전철을 타는 것은 의외로 쉽다. 전철 계단 손잡이에는 어느 방향 전철인지 점자로 적혀 있고, 바닥의 점자블록도 확실하기 때문에 시각장애인들에게 가장 사랑받는 대중교통수단이 바로 전철이다. 특히 요즘은 스크린도어가 잘 설치되어 있어 예전같은 낙상사고도 거의 없어졌다.
전철에서 가장 어려운 것은 환승인데 이것은 나름의 사전 조사가 필요하다. 지인을 통하거나 인터넷 검색을 통해서 어느 쪽이 갈아타는 방향인지를 미리 숙지해 두어야 한다. 그렇게 한두번 다녀보고 나면 대강의 방향을 숙지하게 되고 그러고 나면 어느정도 사람들을 따라 이동하는 요령도 생기게 된다.
다행히 나는 집이 복지관이 위치한 상일동역에서 가까운 길동역 부근이었다. 명동역까지 가는 길은 눈을 뜨고 많이 다녀 봤기에 어느 방향을 향해 가서 어떻게 움직이면 갈아탈 수 있는지를 머리속으로 윤곽을 그릴 수 있었다.
이렇게 앞이 잘 보이지 않는 상항속에서 어딘가를 간다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일단 정안인(시각장애인이 아닌 사람을 일컫는 말)들처럼 대강의 위치만 그려보고 주변에 가서 찾는 형식은 불가능하다. 네비게이션의 그녀처럼 세세한 길잡이가 필요한 것이다. 여기에 더해 대부분의 사람들이 살면서 한번쯤은 고민해보는 문제가 시각장애인들의 보행에서도 역시 등장한다. ‘나의 현재 위치는 어디인가?’
이 난해하고도 형이상학적인 질문이 우리들에게는 현실적이고 몸으로 느껴지는 문제가 된다는 것이 다를 뿐이다.
나의 위치를 알아야 죄회전을 하든 우회전을 하든 유턴을 하든 제자리에서 코끼리코를 하고 다섯바퀴를 돌든 할텐데, 이 중요한 나의 현재 위치 알기가 쉽지않다. 그래서 정안인이 눈으로 슬쩍 보면 알 수 있는 그것을 우리는 오감을 동원해 알아내고, 육감을 더해 확신한다. 사거리에서 우회전을 하기 위해서. 차의 진행방향을 소리로 느끼고 골목에서는 좌우가 터진곳에 나가게되었을 때에 느껴지는 감각을 동원한다. 등이나 얼굴에 와닿는 햇살의 위치로 나의 진행방향이 옳은지 판단하고 상점가를 지날 때는 고정된 가게를 인지하면 도움이 된다. 예컨대 빵집을 지나 얼마 안 가서 전철역이 있다는 것을 알고 있다면, 빵냄새를 맡았을 때 어느정도 나의 위치를 알 수 있게되는 것이다.
보행의 기술만해도 한참을 더 나열 할 수 있지만 이 정도만해도 우리들이 얼마나 피곤하게 살고있는지 이해하는데 큰 무리는 없을듯하다. 이처럼 걸을 때도 두뇌회전이 많이 필요한 시각장애인들이어서 치매에 걸릴 확률이 낮다는 소문이 있는데 이런 피곤한 삶을 살다 보니 단순히 헛소문은 아니겠구나 하는 생각이 든다..
이런저런 고난과 역경 속에 명동을 다녀오면서 그래도 아직 세상이 훈훈하구나 하는 생각을 했다. 가끔 길에서 방향을 찾아 헤매고 머뭇거릴 때마다 주변의 사람들이 도와주어서 길을 찾을 수 있었기 때문이다. 사실 명동역에서 명동성당까지는 자주 가 본 적이 없는 길이라서 가장 난코스라고 생각했는데 어떤 청년들이 ‘도와드릴까요?’ 라는 말과 함께 인도해주어 쉬이 갈 수 있었다.
나중에 선생님께 들었는데 도움을 요청하거나 도움을 받는것까지도 훈련의 과정이라고 한다. 몸의 불편함이 있다는 것은 모든 일을 혼자 다해낼 수는 없게 되었다는 것을 의미하고, 세상속에서 살아가기 위해서는 최대한 자신의 힘으로 문제를 해결해야 하지만, 적절한 시점과 적당한 정도의 도움을 요청하고 받는 것도 필요한 일이기 때문이라고 한다. 결국 인생이란 혼자 살아가기는 쉽지 않은 것이니 말이다.
그렇게 봄과 여름 두 계절을 보내며 나의 두번째 삶을 시작할 수 있게 해 준 한시복의 졸업식이 그 해 겨울에 있었다. 나와 같은 아픔을 겪었기에 나를 온전히 이해해 줄 수 있는 나의 동료들과 오랜만에 만나 담소도 나누었고, 졸업장과 축하 선물도 주고받은 시간… 그 시간 속에서 나는 생각했다. ‘졸업이란 추억을 밑천으로 미래를 사는 시작점’이라고… 결국 추억의 무게만큼 우리는 많은 미래를 담보할 수 있는 것이 아닐까?!
추억이란 단순히 긴 시간을 보냈다고 그 무게가 더 무거워지는 것은 아니고, 각자의 상황과 형편에 따라 달라지는 것일 테니 말이다. 그렇게 생각했을 때, 그 해 겨울 한시복의 졸업은 나의 인생에서 있었던 여러 번의 졸업 중 그 무게가 가장 무거운 졸업이 아니었나 싶다. 그리고 그 무게만큼 나의 미래에 대한 어느 정도의 그림을 그릴 수 있었던 시간이었다.
그 해 겨울도 TV에서는 여전히 한파의 위협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었지만, 나의 마음속에는 산타가 선물해준 난로 덕에 온기가 가득한 시기였다. ‘추억’이라는 값진 선물로 인해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