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7cm 힐을 신고도 운동화 신은 것처럼 사뿐히 뛰었고, 그 힐을 신고 종일 서서 고객 응대를 하는 것도, 또 그 힐을 신고 5~7세 남자아이 몸무게쯤 되는 작품을 안고 걷는 것도 잘했다. 벽에 뚝-딱 못질하는 것도 못질한 벽에 땜빵질 하는 것도 잘했다. 잘해야 했다. 면전에서도 웃어야 했고, 전시 보도자료나 작가 관련 자료를 이메일로 보낼 때 상대가 내 표정을 보지 못함에도 웃는 얼굴을 하고 보내야 했다. 그 어떤 순간에도 친절은 기본이었고 몇백만 원에서 몇억 원을 호가하는 작품을 거래하는 순간에는 자본주의 미소를 잃지 않으며 돈 주인의 온갖 비유를 다 맞추었다.
주말 출근이 기본이고 5~7cm 힐을 신고도 플랫 슈즈를 신은 것처럼 날아다녀야 하는 세상이었지만 그럼에도 누군가 갤러리에 전시된 작품에 관심을 가지면 마치 오늘 처음 설명하는 것처럼 자세히 소개했고, 또 누군가가 작품 구매를 희망하면 이 좋은 작품을 소개할 수 있어 즐겁다고, 내가 작품을 판매할 수 있음에 감사했다. 아트페어 기간이면 하루에 몇억~몇십억이 코엑스 전시장 어느 작은 부스에서 거래되었다. 그러며 종종 미술계 관계자들은 그랬다. 미술계는 불황이 없다고! 이유인즉 어차피 미술계를 움직이는 사람들은 정해졌고 그들은 불황에도 끄떡없는 자산가였기 때문이다.
이런 미술계가 뭐가 그리 좋아 보여서 대학교 졸업을 앞둔 4학년 2학기 조기 취업을 하며 학교를 탈출했다. 크리스마스 같은 빨간 날도 출근해 갤러리 창문 너머로 떨어지는 진눈깨비를 보며 행복해했고 봉산동 문화거리라고 불린 그 골목에 근무하는 학교 선배들과 길에서 만나 깔깔대며 나름의 스트레스를 풀었다. 첫 취직을 시작으로 5년여를 미술계에 몸담았다. 그렇게 내 첫 직업은 큐레이터였다. 대학교 졸업 후 대학원까지 공부하고 논문까지 썼지만, 지금은 전혀 다른 일을 하며 산다. 2003년, 그 당시만 해도 큐레이터에게 석사는 필요한 자격증과도 같았고 그즈음 유학파들이 미술계에 유입되었다.
오랜만에 미술관에 갔다. 종종 좋은 전시 또는 관심 있는 작가 전시가 있을 때면 미술관이나 갤러리를 찾았지만, 코로나19 이후로는 처음이다. ‘뮤지엄 산’은 대학원 재학 시 같은 수업을 듣던 한 학생이 이곳 관계자였던 탓에 준비과정 이야기를 듣기도 했고 종종 지인들이 추천한 곳이다. 드디어 그 미술관에 방문했다.
기본 입장료만 19,000원. ‘굳이 그렇게 돈 주고 가야 해?’라고 하지만 그만큼 받을만하니 받는 것 아닐까. 기본 입장료에 또 한 곳의 전시실 작품 관람까지 포함해 35,000원짜리 티켓을 끊었다. 이곳 카페에서 커피 한 잔을 마시려 해도 기본 입장료는 내야 한다. ‘뮤지엄 산’은 한솔문화재단에서 운영하는 곳으로 소장 중인 작품으로 상설전시, 종이박물관, ‘제임스 터렐(James Turrell)’관, 명상관 등을 갖췄다.
내가 산 35,000원 티켓은 기본 전시+제임스 터렐 전시관 관람이 포함된 것이다. 제임스 터렐 전시관은 관람 시간과 인원이 정해져 있고 한 명의 도슨트 안내로 관람이 이뤄진다. 이미 미술계에 관심을 끊은 지 오래라 작가 ‘제임스 터렐’은 초면이다. 제임스 터렐관은 뮤지엄 가장 안쪽에 자리한다. 티켓을 발권하는 웰컴센터-플라워 가든-워터가든-미술관 본관-스톤 가든을 지나야 한다.
시간에 맞춰 제임스 터렐관에 입장해 인솔자의 안내에 따라 작품 관람을 한다. 설치미술을 하는 제임스 터렐의 작품은 모두 5점. 관람 시간은 20~25분가량 소요된다. 단 한 작품도 사진 촬영이 허용되지 않는다. 작가의 요청에 따른 것인데 만약 사진 촬영이 허락되었다면 분명 SNS의 성지가 되었음이 분명하다. 작품 가치도 떨어졌을 테다. 다섯 점의 작품뿐이지만 작가 의도와 ‘빛의 마법사’로 불리는 그의 작업 세계를 충분히 이해할 수 있다. 안도 다다오가 설계한 미술관이지만, 제임스 터렐관은 작가가 직접 공간 설계부터 작품 제작까지 맡았다. 공간부터 작품인 셈이다. 건물이, 공간이 캔버스 일부이고 외부라 할 수 있는 자연에서 생기는 빛이 또 하나의 소재이다. 있는 것 같으면서 없고, 없는 것 같으면서 있다. 신기하고 신비하고 그 안에 뭉클한 울림이 있다. 소재의 조화가 감동을 준다.
작품 감상을 하며 든 생각도 생각이지만, 그 작품 뒤에 빛나는 것이 있었으니 바로 인솔자였다. 그녀를 보며 오래전 나의 열정이 떠올랐다. 관람객 눈을 마주하며, 작가를 대신해 작품을 설명하는 그 눈동자에 나의 20대 열정이 울림처럼 가슴을 두드렸다. 현재 글 쓰는 일을 하며 가지는 열정도 물론 있지만 20대 나의 첫 열정은 지금의 열정과 그 모습이 달랐을까? 그때 멈추지 않고 계속 큐레이터로 일했다면 나는 지금 어떤 모습일까...?
켜켜이 쌓인 시간 속에 주말 근무가 너무 힘들었고, 또 어느 날은 회장님과 사모님의 비유를 맞추는 게 진저리가 났다. 돌이켜보면 이 두 가지 이유가 큐레이터에 브레이크를 건 가장 큰 이유다(당시 큐레이터 친구 중 관장님 갑질을 못 이기기도 했지만 내가 근무한 갤러리 관장님과 회장님은 꽤 좋았다. 해외에서 오래 일하신 분들이라 매너, 사고가 조금 더 유연했다. 물론 급여도 다른 갤러리보다 조큼 많았다).
근데 주말도 없는 프리랜서 일을 하고 회장님 사모님 비유는 아니지만, 가끔은 클라이언트 비유를 맞추는 생활을 한다. 높은 힐 벗고 운동화 신고 누비는 세상은 더 넓고 크다. 큐레이터가 세상 전부인 줄 알았던 20대의 나는 이제 더이상 없지만, 40대가 된 내 앞에는 그보다 더 넓고 큰 세상이 있다. 오래전 사라졌던 그 날의 불씨가 문득 살아난 하루다. 그 감정을 기록해두고 싶어 40번째 생일에 두서없이 키보드를 두드리고 있다. 지금의 열정이 그때의 열정처럼 빛나길. 당신의 열정도 빛나길 바라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