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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셩혜 May 25. 2019

책장을 넘기던 아빠의 시간

읍내 서점은 몇 곳 있었지만, 교과서나 문제집 말고도 베스트셀러 같은 책을 파는 곳은 딱 하나였다. 바로 ‘진문서점’. 이곳은 아빠의 단골 책방이자 친구가 운영하는 곳이다. 요즘처럼 온라인 서점은 찾아볼 수 없는 시절이었고, 읍내와 가까운 대구 시내에 대형 서점이라곤 교보문고가 있었지만, 그것도 1998년쯤인가 문을 열었다. 

아빠는 잠에서 깬 이른 새벽이나, 잠 오지 않은 늦은 밤 늘 책을 읽었다. TV에서 적당히 볼만한 프로그램이 없을 때도 침대 머리맡에 허리를 기대고 책을 폈고, 특별한 일 없는 주말 오후에도 안방에 있던 전용 의자에 앉아 볶은 검은콩을 간식 삼아 먹으며 책을 읽곤 했다. 그 책은 모두 진문서점을 통해 샀다. 조정래 작가의 『태백산맥』 이나 박경리 작가의 『토지』처럼 시리즈로 된 장편 소설을 주로 읽었고 사진을 취미로 붙일 즈음엔 식물도감처럼 사진이 많은 책을 옆에 끼고 있었다(초창기 아빠가 촬영한 사진 대부분은 꽃이나 들풀 사진이다). 시리즈 책은 꼭 한 번에 주문하지 않고 한 권씩 구입했고, 신문에서 신간 소식을 보고 읽고 싶은 책이 생길 때면 늘 진문서점에 가서 주문했다. 책이 입고되었다고 집으로 전화가 오면 부리나케 달려갔다. 뭐, 그런 볼일이 없을 때도 친구 핑계 삼고 가서 매대에 서서 책을 훑었고, 나와 동생이 풀 문제집, 가끔 읽을 책도 사다 주곤 했는데 그중 기억에 남은 책이 홍정욱 작가의 『7막 7장』이다. 


내가 스무 살 때쯤이었나, 캠퍼스의 낭만에 취해 책이라곤 전공 서적밖에 보지 않았을 무렵 아빠는 “책 속에 길이 있다.”라는 진부한 이야기를 종종 했지만, 그렇다고 “무조건 많이 읽어야 한다.”라고 강요하지는 않았다. 대신 언젠가 이런 이야기를 했다. “나이가 들어서 책을 읽으니 한 번 읽어서 내용이 머리에 들어오지가 않아 몇 번씩 봐야 해.”라고. 

대학 졸업과 동시에 서울로 터전을 옮긴 후 고향 집에 갈 때마다 아빠의 책은 점점 쌓여갔고 언젠가는 새 책꽂이도 들여놓았다. 쓸데없이 시간을 허비하는 걸 싫어했던 아빠에게 책 읽기는 시간을 효율적으로 보낼 수 있는 방법이었다. 온라인 서점이 등장하고 주문과 배송이 클릭 한 번으로 간편해졌을 무렵에도 아빠는 꼭 진문서점에 가서 책을 주문하고 찾아왔다. 조금 늦더라도 그렇게 받는 재미와 기다리는 기쁨이 있다고. 하지만 그것도 서점을 운영하던 친구가 심장마비로 갑자기 유명을 달리하고, 서점 문을 닫기 전까지다. 그리고 몇 해 뒤 아빠도 하얀 연기처럼 훌훌 떠났다.  


최근 나는 아빠가 남긴 그 말의 의미를 몸소 깨닫는 중이다. 웬만한 감동이나 충격적인 전개가 아니고서야 한 번 읽은 책 내용이 오래 기억나지 않는 것(긴 여운이 남지 않은 책이어서 그럴 수도 있지만). 그래서 마음에 드는 책은 한번씩 더 읽어보려 침대 옆 탁자에 올려두고 시간이 날 때마다 다시 읽기를 도전하는데 쉽지 않지만 확실히 두 번씩 읽은 책은 처음 읽는 것과 다르긴 하다.  

책 읽던 아빠의 모습 때문인가 나 역시 책을 가까이하고 살 수 있게 되었다. 독서 장르를 편식하는 경향이 없진 않지만, 시간이 날 때면 하는 것 중 하나가 책 읽기이고 휴대폰 이용하는 시간을 줄이고서라도 책을 펼치려 노력한다. 여행을 하며 알게 된 동생 윤주와 만나면 우리는 서로 읽은 책을 추천하거나 함께 서점을 찾는다. 얼마 전부터는 아빠와 함께 세계문학전집 다시 읽기를 시작했다고 전하는 그녀의 일상이 내심 부럽다. 

살바람이 지나고 여름을 재촉하는 바람이 아침저녁으로 머릿결을 스친다. 자신의 전용 의자에 앉아 창문 너머 살랑살랑 불어오던 바람에 나폴 거리는 책 냄새와 함께 책장을 넘기던 그 풍경이 이내 마음에 그려진다. 그러다 문득 궁금해졌다. ‘아빠는 어떤 책을 가장 감명 깊게 읽었을까?’하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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