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겨진 자리에서
인생은 상실의 연속이다.
우리는 태어나자마자 완벽한 생의 터전이었던 자궁을 잃고, 자라며 우정을 잃고 사랑을 잃는다. 나이가 들수록 직업이나 재산, 건강을 잃고, 언젠가는 부모와 형제를, 때로는 자녀를 잃으며 종국에는 자신의 생명까지 잃는다.
이렇게 보면 상실은 예외적인 사건이 아니라 보편적인 삶의 기본 조건에 가깝다.
어른이 된다는 것은 아마도 상실을 피하지 않고 다룰 줄 알게 된다는 뜻일 것이다. 우울이나 분노조절의 문제, 자살 충동이나 중독은 많은 경우 상실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지 몰라 생겨나는 증상들이다. 잃지 않으려 애쓰거나, 잃은 것을 서둘러 밀어내려 할수록 마음은 더 크게 흔들린다.
“시간이 지나면 괜찮아질 거야.”
“시간이 약이야.”
많은 사람들이 상실을 잊으라고 위로한다. 동생을 잃은 뒤, 나 역시 그런 말을 종종 들었다. 물론 위로하려는 마음이라는 걸 모르는 바는 아니었다. 그럼에도 그 말들에 강한 거부감과 알 수 없는 분노를 느꼈다. 시간이 지나면 잊히고, 그래야만 한다는 전제가 너무 빠르고 단정적으로 다가왔기 때문이다. 마치 슬픔에도 처리 기한이 있는 것처럼 들렸다.
실제로 시간이 흐르며 슬픔의 빈도는 줄었다. 눈물을 흘리는 날도 적어졌고, 바쁜 삶에 치이다 보면 잠시 잊고 사는 날도 생겼다. 그러나 그렇다고 결코 슬픔의 깊이가 얕아지지는 않았다. 상실감과 허망함은 오히려 더 또렷해졌다. 잊으려 애쓸수록 마음은 더 아팠고, 어떻게든 잊으려고 애를 쓰는 스스로를 죄책감으로 몰아넣게 되었다.
동생의 장례를 마치며 느꼈던 깊은 허망함은 속도감에서 비롯되었다.
정해진 절차에 따라 너무 빠르게 동생을 보내버렸다. 서둘러 태우고, 묻고, 다시 일상으로 돌아가야 한다는 암묵적인 분위기 속에서 “이제 잊어야 한다”는 말은 동생의 존재를 서둘러 정리하라는 말처럼 다가왔다.
지나고 보니 내가 그 시간을 버틸 수 있었던 것은 잊음이 아니라 받아들임이었다.
동생의 죽음을 거부하며 몸부림치던 시기를 지나, ‘나 역시 언젠가는 죽고, 네가 조금 먼저 갔을 뿐’이라는 단순한 명제를 받아들이게 되었을 때, 비로소 슬픔은 다른 형태로 자리 잡기 시작했다. 그때부터 나는 극복이 아니라 애도를 할 수 있게 되었다.
상실을 떼어내야 할 대상이 아니라 삶 안으로 들여와야 할 것이다.
한 심리학자는 이렇게 말했다.
“대상을 상실했을지라도 그 무언가가 우리 마음속에 여전히 살아 숨 쉬고 있다고 느낄 수 있다면 우리는 그를 상실하지 않는다. 다만 그의 위치가 밖에서 안으로 바뀌었을 뿐이다.”
이 말이 위로가 되는 이유는 상실을 없애주기 때문이 아니라, 그 의미를 바꿔주기 때문이다. 함께 기억해 주는 것, 그 사람이 삶 속에서 여전히 작동하고 있다고 느끼게 해주는 것. 잊게 만드는 것이 아니라 살아 있게 만드는 것, 그것이 진정한 위로다.
미국의 작가이자 저널리스트 조앤 디디온은 『슬픔의 해』에서 묻는다.
“슬픔을 어떻게 살아낼 것인가.”
그는 슬픔을 이기려 하지 않는다. 밀어내지도 않는다. 그저 함께 걷는다. 극복이 아니라 공존이다.
앞으로도 우리는 틀림없이 계속 무언가를 잃을 것이다.
예상치 못한 순간, 다시 한번 큰 상실과 절망을 마주하게 될지도 모른다. 또다시 견디기 힘든 슬픔에 잠식되는 시간도 오겠지만, 그럼에도 이제는 상실을 어떻게 대해야 하는지에 대해 조금은 알게 된 것 같다.
떠난 동생이 내게 남겨준 것은 단지 부재만이 아니라, 삶과 죽음을 정면으로 바라보는 태도와 상실을 밀어내지 않고 붙잡은 채 살아가는 법이었다.
어쩌면 삶이란 끊임없이 무언가를 잃어가며, 그럼에도 계속 걸어가는 과정인지도 모른다. 고정된 것도, 영원히 붙들 수 있는 것도 없기에 결국은 모두 흩어지고 사라질 것이기에 지금 이 순간은 더 선명해진다.
모든 것이 지나고 흘러가는 길 위에 있다는 사실을 알기에 순간에 집착하고 매달리기보다는
조금 더 겸손한 마음으로,
조금 더 감사하며
그저 주어진 하루를 살아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