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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부라는 건 이런 걸까

3부. 서툰 우리, 그래도 함께

by 윰글

‘내일을 안다면 좋을까?’

사람은 내일을 모른다. 그래서일까, 미래가 궁금한 사람들은 ‘점집’이나 ‘사주카페’, ‘타로숍’을 찾는다. 운세를 알려주는 앱을 깔거나, 온라인 상담을 신청하기도 한다. 하지만 그곳에서 내가 원하는 답을 얻을 수 있을까. 만약 세상사가 오로지 노력만으로 이루어진다면, 이런 일들은 애초에 필요하지 않았을 것이다. 결국 사람의 미래란 예측할 수 없는 일. 그래서 우리는 그 답답한 마음을 어디엔가 기대고 싶어지는 건 아닌지. 예를 들면 아이의 입시, 취업, 출산….

특히 평생을 함께할 배우자를 만나는 일은, 그야말로 불가사의하다.


“별처럼 수많은 사람들 그중에 그대를 만나 / 꿈을 꾸듯 서로를 알아보고”

— 이선희 〈그중에 그대를 만나〉


하늘의 별만큼 많은 사람들 중 단 한 사람을 만나야 하는 일. 찾는다고 해서 만날 수 있는 것도 아니고, 만난다고 해서 평생 함께할 수 있으리란 보장도 없다. 청춘의 시간 동안 우리는 방황하고, 만나고, 헤어지고, 다시 누군가를 만나며 그 인연을 이어가기 위해 애쓴다. 그래서일까. 지금 이미 결혼을 한 사람들은 그 자체로 놀라운 인연을 이룬 셈이다. 나 역시 그중 한 사람이다.


부부의 인연을 맺은 남녀는 보통 스무 해가 넘는 시간을, 서로 다른 집에서 자라온 사람들이다. 그러니 생활습관도, 의사소통 방식도, 돈을 대하는 태도도, 사랑을 표현하는 방법도 다를 수밖에 없다. 결혼이란 결국, 그 차이를 조금씩 좁혀가는 일이다. 어느 한쪽이 양보하든, 서로의 중간을 찾아가든 —그 과정 속에는 크고 작은 다툼이 생긴다.

하지만 그 다툼조차 꼭 필요한 과정이다. 서로를 알아가는 일에는, 부딪힘이 필요하니까. 지금의 우리 부부는, 상대의 “아~” 하는 소리만 들어도 안다. 아픈 건지, 서운한 건지, 마음이 읽힌다. 고개를 돌리는 눈빛 하나만으로도 ‘무엇이 필요하구나’ 하는 생각이 든다.

하지만 우리도 처음부터 이랬던 건 아니다. 신혼 때의 우리는 서로의 말을 곧이곧대로 오해했고, 작은 서운함에도 이불을 뒤집어쓰고 울던 날이 있었다. 남편이 내 편이 되어주지 않을 때면, ‘내가 왜 결혼을 했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한 사람을 믿고 남은 인생을 걸었는데, 그 한 사람이 내 편이 되어주지 않으면 세상이 무너지는 것 같았다.


결혼 25년 차. 이제는 결혼생활의 대부분이 익숙하다. 사람도, 상황도, 감정의 흐름도.

“싸울 일이 뭐가 있을까?”

결혼을 나보다 네 해 먼저 한 시누이가 했던 말이다. 그땐 그 말이 잘 이해되지 않았다. 서로 전혀 다른 환경에서, 거의 서른 해를 따로 살아온 두 사람이 한 집에서 함께 산다는 게 얼마나 어려운 일인데 —어떻게 다툼이 없을 수 있단 말인가.

하지만 지금은 안다. 그 말이 ‘배려’를 뜻했다는 것을. 서로를 알고, 상대의 마음에 한 발 더 다가서려는 노력을 하다 보면 정말로 싸울 일이 줄어든다. 결국, 익숙함 속에서 자라나는 건 ‘사랑’이 아니라 ‘배려’ 인지도 모른다.


“나, 도저히 이대로는 못 살겠어. 잠깐 어디 좀 다녀올게.”

그 말을 남기고, 나는 무작정 기차에 올랐다. 물론 목적지는 있었다. 서울에 사는 여동생 집이었다. 갑작스레 들이닥친 언니를 보고, 동생은 당황했다. 나는 그 집에서 일주일을 머물렀다. 그동안 남편은 단 한 번도 연락하지 않았다. 그때, 나는 결혼 8년 차였다.

가슴이 터질 것 같았고, 지금 당장 집을 나가지 않으면 미칠 것만 같았다. 일주일쯤 지나 남편에게서 연락이 왔다.

“지금 좀 봐요.”

그 말을 듣는 순간, 그 말을 듣지 않으면 우리 부부는 끝날 것 같았다. 그렇게까지는 하고 싶지 않았다.

“알겠어요. 지금 내려갈게요.”

그리고 우리는 마주 앉았다. 남편이 먼저 말했다.

“내가 어떤 걸 고치면 되는지 말해주세요. 제가 고칠게요.”

그 말을 듣는 순간, 최악의 상황은 피할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나는 감정을 표현하는 데 서툰 사람이었다. 말하지 않으니 남편은 내가 괜찮다고 생각했다. 그게 문제였다. 내 잘못이었다. 말하지 않았으니.

그날, 8년 동안 눌러왔던 마음을 모두 털어놓았다. 속상하고 힘들었던 일들, 마음속에 담아둔 서운함과 외로움까지.

“당신이 그렇게 힘들어하는 줄 몰랐어요.”

그 말을 듣는 순간, 눈물이 터졌다. 모를 리가 없는데, 우리는 서로의 마음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했다. 그동안 혼자 삭혔던 시간은 결코 현명하지 않았다. 곪은 상처는 고름을 짜내야 낫는 법이니까.

그리고 그 이후, 남편은 조금씩 달라지기 시작했다. 이렇게 해서 우리는 결혼생활의 한 고비를 넘긴 것이다.

앞으로 또 얼마나 많은 산을 넘어야 할까.

“60이 되면 남자는 좀 달라지더라.”

그 말을 듣던 순간, 나는 그때까지 버틸 수 있을까 걱정했다. 하지만 헤어질 수는 없으니, 버텨야 했다. 그리고 지금, 우리는 그 시간을 모두 지나왔다.





‘삶의 동반자’

세상에서 누가 아무 이유 없이 내 편이 되어줄까. 어떤 상황에서도 기대고, 편들어달라고 말할 수 있는 사람. 그건 아마 부부밖에 없을 것이다. 부모의 사랑은 여러 자녀와 나누는 것이다. 그러니 나 혼자 독차지할 수는 없다.

하지만 부부는 다르다. 이 사람은 온전히 나만의 존재다. 그래서일까. 결혼생활의 시간이 쌓일수록, 마음속에 든든함이 스며든다. 나는 그래서 스스로를 ‘운이 좋은 사람’이라고 부른다..


‘부부의 의무’

부부가 만나 가정을 이루면, 그에 따른 ‘책임’이 생긴다. 누가 말하거나 다그치지 않아도 해야 하는 일. 생계를 유지하고, 아이를 키우고, 부모를 부양하며, 서로를 존중하고 신뢰를 지키는 것. 이런 눈에 보이는 책임 외에도, 서로의 마음을 살피고, 정서적으로 자극제가 되며, 상대방을 돌보는 일까지 포함된다. 이 모든 것이 가정의 행복과 연결되니, 그 어느 것도 소홀히 할 수는 없다.

“너는 아무리 봐도 네 신랑을 더 좋아하는 것 같구나.”

결혼할 때, 엄마가 하신 말씀이 지금도 생생하다. 드라마 같은 스토리를 지나 결혼에 골인했지만, 당시 엄마의 반대는 컸다. 그럼에도 우리 사랑 앞에서는 아무 힘도 되지 못했다.

“엄마, 이번 한 번은 불효할게요.”

그때만 해도, 신랑이 내 인생에서 사라진다는 것은 상상조차 할 수 없었다. 우스갯소리로 “호르몬 때문”이라 변명했지만, 결국 우리는 단 2일 동안 헤어졌다. 그리고는 아무 일 없었다는 듯 다시 만났다. 그렇게 지금까지, 서로의 곁을 지키고 있다.




“엄마가 반대하셔서 우리 결혼 못할 것 같아.”

내 말에 남편은 고개를 숙였다. 아무 말도 없이, 그저 내 눈치를 보는 그의 모습. 나는 그 말을 남편에게 건넨 그날만큼은, 내 마음만 결정되면 그와 헤어질 수 있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말하고 난 뒤, 숨이 막혔다. 어디를 가든, 누구를 만나든, 그의 얼굴이 떠올랐다. 하루가 공허했고, 무슨 일을 해도 즐겁지 않았다. 누구를 만나도, 남편 얼굴만 떠올랐다. 그래서 무작정 집을 나섰다.

‘멀리서 보면 되지. 만나는 것도 아닌데, 뭐 어때.’

‘헤어져도 볼 수는 있는 것 아닌가.’

남편의 사무실로 향했다. 그가 막 사업을 시작하던 시기라, 5평 남짓한 작은 공간이었다. 골목에 들어서자 가슴이 두근거렸다.

‘들키면 어떡하지…’

‘들키면 뭐 어때. 죄를 짓는 것도 아닌데.’

유리창으로 된 출입문 너머, 그의 모습을 바라보았다. 벽 쪽 책상에 앉아 있는 남편의 두 어깨가 흔들리고 있었다.

‘울고 있구나.’

묻지 않아도 알 수 있었다. 그의 모습을 보고, 나는 망설임 없이 문을 열고 사무실로 들어섰다. 예고 없이 나타난 나를 본 남편은 일어나 내게 걸어왔고, 아무 말 없이 나를 안았다.

“우리 못 헤어지겠어. 아니, 왜 헤어져야 돼?”

내 말에 그의 팔에 힘이 실렸다. 이렇게 우리는 다시 만났다. 이틀 동안의 짧은 헤어짐은, 그렇게 끝났다.


결혼에 절대적인 조건이 있을까? 나는 그렇지 않다고 본다. 만약 그런 절대적인 기준이 존재한다면, 과연 내가 결혼할 수 있었을까? 아마도 세상 대부분의 남녀가 결혼을 하기 어려워질지도 모른다.

하지만 사랑의 호르몬은 기묘하다. 상대방이 유독 좋아 보이고, 다른 누구와 있어도 그 사람만 눈에 들어온다. 그 사람이 없으면 안 될 것 같고, 매 순간 상대방이 떠오른다. 헤어지는 것이 싫어, 그래서 ‘결혼’을 선택한다. 계속 함께 있고 싶어서, 우리는 만난 지 일 년 정도 되었을 때 결혼을 했다.

사랑은 이런 것이다.


“엄마, 원래 아기 키우는 일이 이렇게 힘들어요? 왜 미리 말 안 해줬어요?”

고향을 떠나 타향살이를 하는 일은 이런 것이다. 말도, 성향도, 문화도 다르다. 거기에 친정 가족 한 명 없는 곳에서 결혼생활을 시작하니 어려움은 한두 가지가 아니었다.

결혼한 지 일 년 정도에 큰아이가 태어났다. 나는 잠이 부족했는데, 아이는 밤잠이 적었다. 돌이 지나면 잘 잔다는데, 그것은 내게 꿈같은 일이었다. 한 번 울기 시작하면 끝이 보이지 않았고, 얼마나 자지러지게 우는지 귀청이 떨어질 것 같았다. 매일 아이를 안고 나도 울곤 했다.

하루는 겨우 큰아이를 재우고 잠시 밖에 나와 공중전화로 엄마에게 전화를 걸었다.

“너는 한 명 가지고 왜 그러니. 엄마는 네 명이나 키웠는데.”

그 한마디에 나는 결심했다. ‘엄마에게 다시는 힘들다고 말하지 말자.’

그 결심과 함께 나는 지금까지 25년간 결혼생활을 이어오고 있다.

아이를 낳고 키우며 흘린 눈물과 남편에게 한 하소연, 아이의 열경기로 벌거벗은 채 응급실로 향했던 날들. 힘들 때 남편에게 기대어 울었던 순간들. 하루에도 수천, 수만 가지 생각이 떠오르고, 울고 웃는 일상의 반복.

결혼생활에서 중요한 것은 ‘무슨 일이 있었는가’가 아니라, 그 모든 순간을 누구와 함께 하느냐이다.

그래서 결혼생활은 결국 ‘그중에 그대를 만나’ 아니면 ‘그중에 누구를 만나느냐’에 달려 있다.




"교장선생님, 계십니까?"

우리 부부의 결혼식 주례는 내가 근무하던 학교의 교장선생님께서 맡아주셨다. 주례사 내용을 A4용지에 적어오셔서는 결혼식 당일 낭독하셨다. 그 금과옥조 같은 말씀이 당시에는 전혀 들리지 않았다. 결혼식에 정신이 팔려서 그랬던 것 같다.

결혼식이 끝나고 엄마는 이렇게 말씀하셨다.

“교장선생님의 주례사가 좋더라.”

그때는 잘 몰랐던 주례사가, 결혼 생활을 하면서 떠오를 때가 있다. 그럴 때마다 교장선생님께 더 감사한 마음이 든다.

신혼집에서 차로 20분 정도 거리에 사셨던 교장선생님을 명절 하루 전날, 인사를 드리러 방문했다.

"들어오세요."

"차 한 잔씩들 해요."

"여기 오니까 친정에 온 것 같아요."

"그렇게 생각하면 되죠. 명절에 시간 되면 놀러 와요."

신규 교사 시절, 교장선생님은 하늘처럼 높고 먼 존재였다. 그런데 학교에서는 어려운 사이였지만, 개인적인 자리에서는 친정아버지처럼 편안하게 대해주셨다.

"저는 결혼 초에 부모님과 아내 사이에 갈등이 생기면 늘 부모님 편만 들었어요. 그래서 아내를 힘들게 했습니다. 지금 생각해 보니 후회가 돼요. 그러니 00 군은 그러지 말고, 꼭 아내를 이해하고 안아주세요."

사실 교장선생님께서 말씀하시는 것과 비슷한 상황을 우리 부부는 이미 겪었다. 한국에서 며느리로 살아간다는 일이 결코 녹록지 않듯, 남편 역시 새로운 가정을 책임지고 적응해야 하는 부담이 있었을 것이다. 서로 다른 환경과 습관 속에서 이해하고 배려하는 일이 얼마나 중요한지, 그때 우리는 몸소 배웠다.

“잘 알겠습니다. 그렇게 노력할게요.”

철석같이 약속한 남편. 이후에도 비슷한 상황은 반복되었지만, 결혼이 처음인 만큼 남편에게도 적응 기간이 필요했을 것이다.


"엄마, 오늘 친구들과 집에 놀러 와도 돼요?"

언니와 9살 터울인 작은 아이가 어느덧 중학생이 되었다. 시험이 끝난 주말이면 친구들과 남포동에 놀러 가고, 지하철을 타고 집으로 돌아온다. 늦둥이라 집 앞에만 나가도 걱정이 되던 작은 아이가 이렇게 훌쩍 자라 있는 모습을 보니, 나 또한 결혼생활을 통해 쌓아 온 시간이 느껴졌다. 얼굴의 주름과 흰머리는 그동안의 시간을 증명한다. 그래도 지금의 내 모습이 좋다.

두 아이가 태어나고 이제 각자 자기 길을 찾기 위해 노력한다. 남편은 여전히 내가 하는 말에 지지를 보내고, 타인과의 갈등 상황에서는 무조건 내 편이 되어준다. 내 표정과 마음을 살피며 나를 아껴주는 그의 모습이 든든하다.

"고맙고, 다정한 사람."

"너희 남편은 아무리 봐도 85점 이상이야."

남편 자랑을 하는 친구의 말에, 나는 미소를 짓는다. 남의 떡이 커 보인다는 말처럼, 다른 시선에서 보는 우리 남편은 그만큼 믿음직스럽다.

결혼으로 새로운 사람과 가족이 되는 일은 쉽지 않지만, 불가능하지 않다. 어머님 댁에 도착하면 나는 “어머니, 저 너무 피곤해요”라며 안방 침대에 드러눕는다. 신혼 때는 상상도 할 수 없던 모습이 이제는 자연스럽다.

남편 역시 가족을 위해 변했다. 회사 일에 몰두하던 그는 이제 ‘칼퇴근’을 하고, 내가 만든 요리를 무조건 맛있다며 칭찬을 아끼지 않는다. 미용실에서 머리를 하고 오면 ‘예쁘다’라며 웃어주고, 두 아이에게는 사랑과 관심을 쏟는다. 이런 모습은 세월이 만들어낸 사랑의 힘이다.


나는 지금, 아파트 입구에 남편의 차가 들어왔다는 알림 문자를 받고서 현관문이 열리길 기다리고 있다. 남편도, 아마 나를 기다리고 있겠지. 우리 부부의 결혼생활의 우여곡절은 굳이 말하지 않아도 된다. 사는 일이 원래 다채로우니까.

결혼도 그렇다. 이 익숙함 속의 변화, 이 거짓말 같은 일상이야말로 기적이다.


“오늘은 엄마, 아빠의 결혼기념일이지만, 누구 생일이라고 할까?”

“그럴까요. 그렇다면 생일 축하 노래에서 ‘생일’을 ‘결혼’으로 바꿔요.”

우리는 이렇게 비논리를 웃음으로 바꾸며 살아왔다.

이따금 남편에게 서운함이 밀려올 때가 있다. 이유를 따지자면 끝도 없지만, 그럴 때는 굳이 말을 아낀다. 대신 그순간 나는 잠시 집을 나온다. 가까운 공원이나 아파트 아래 뜰을 걸으며 마음을 식힌다.

바람이 뺨을 스치고, 낙엽이 발끝을 맴돈다. 지나가는 사람들과 눈을 마주치고, 이웃이 데리고 나온 강아지가 꼬리를 흔들며 다가온다. 화단에 핀 꽃을 보고, 그네를 탄다. 그렇게 시간을 보내면 서운했던 마음이 풀리고, 머릿속이 맑아진다. 그리고 이런 말이 떠오른다.

‘남편, 고마워요.’

같은 세월을 함께 살아간다는 건 단순한 감정이 아니다. 의리이자 우정이고, 그 위에 사랑이 덧입혀진다. 세월은 그 사랑을 정교화시킨다. 그리고 다시금 다짐하듯 속삭인다.

“21년을 당신과 함께 살아서 행복합니다.”


부부라는 건 이런 걸까.

고맙고, 미안하고, 사랑하고.


그리고 익숙해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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