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감림 Jun 02. 2022

종이 앞에 Black out

나를 위한 그림 그리기 2

그림 그릴 준비는 마쳤는데 5분이 지나고, 10분이 지나도 움직일 줄 모르는 나의 손. 무슨 일일까요? 조그만 종이 한 장이 갑자기 태평양 같아 보이고, 뭔가 저 백지를 다 채워야 할 것 같은 강박이 막 생기려 하고요. 백지 시험의 향기가 스멀스멀 올라옵니다.



움직여라 좀



빈 종이에 그리는 그림이란 게 객관식 아닌 주관식이라서요. 그것도 정답 없는 주관식이니 어렵단 느낌이 듭니다. 더 정확히는 정답 없이 내 맘대로 해도 틀리지 않는 것을 경험한 일이 많지 않다 보니 ‘낯설게 느껴진다’ 게 맞을 거예요. 그래서 종이 한 장은 우리에게 정답 없는 자유를 맛보게 하는 아주 좋은 도구가 됩니다.




낯선 종이 한 장의 여백




제가 그랬어요. 종이 한 장이 어찌나 커 보이던지



초등학생일  용돈 모아 비싼 미술 용품을 샀었어요. 그런데 막상 그리려고 앉았더니 어렵더라고요. 그래도 뭔가 그려야   같아 너튜브로 ‘초보자를 위한 10 그리기같은 콘텐츠를 찾아봤었습니다. 꺼졌던 의욕이 샘솟을 정도로 쉬워 보여서   있을 거라고 생각했는데요. 저만 산으로 가는  같은 느낌적인 느낌. 애써 위로하고 살짝 미뤄뒀던 기억이 있습니다.



잘할 수 있을 거라 기대했었나 봐요






또 다른 위기가 찾아왔습니다. 예고에 입학하고서 처음으로 미술 전시회를 준비하던 때였는데 긴장되기도 하고 잘하고 싶어 어요. 캔버스(그림 그리는 천) 크기와 재질을 정하는 것부터 어떤 재료로 그릴지, 그리고 가장 중요한 '뭘 그려야 할지' 스스로 결정해야 했습니다.


뭘 그릴까, 뭘 그릴까. 중얼거리기도 여러 번. 예고 다니면서 제일 어려웠던 순간으로 기억해요. 그림은 정말 좋아했는데, 주관식이란 게 어려웠거든요. 입시미술의 그늘에서 벗어난 지 얼마 안 되었다는 것도 이유 중 하나일 수 있지만 저는 생각하는 게 어려웠던 사람이었어요. 모두 그런 건 아니지만 입시 미술은 정형화된 규칙이 있어요. 주어진 틀에 맞춰서 그리면 되거든요. 그리고 앞선 선배들이 쌓아놓은 여러 합격작들과 선례들로 인해서 족보 같은 예시 패턴들이 있어요. 그러니 백지에 보는 객관식 시험이라 할 수 있죠. 이건 어려운데 어렵진 않았어요. 그림 그리는 기술에 관해 묻는 시험이었기 때문이에요.


생각이 생각보다 어려워서......



처음이니까 그럴듯하게 하고 싶어서 방문만 한 사이즈의 캔버스를 준비했어요. 제 몸보다 큰 캔버스를 앞에 두고 한동안 자괴감을 많이 느꼈어요. 막상 그리려니 그리고 싶은 그림이 없어 아무것도 못하고 있으니까요. 그때 알았어요. 기술보다 우선하는 마음과 생각의 힘을요.


하지만 아직 우리네 학교와 학원에서는 기술을 가르치는데 특화되어있는 것 같습니다. 심지어 특목고, 자율고라고 해도 기저에 전문직 양성을 위한 교육이 우선 되어있습니다. 그렇게 어릴 적부터 학교에 십 수년 몸담아 있다 보면 배추 절여진 것처럼 주어진 것만을 하는 수동적인 사람이 되어가는 것 같아요. 오늘 뭐 먹고 뭐 할지 같은 단순한 생각만 하다가 진짜 생각하는 힘을 잃어버리기는 너무 쉽죠. 그러니 어느 순간 생각하는 소수에 의해 끌려가는 대중이 되어있는지도 몰라요.


저는 오늘도 자율성을 잃어버린 아이들을 만나곤 합니다. 그림  장을 주고 자유롭게 그림을 그려보게 하면 많은 아이들이  종이에 주어진 자유를 낯설어합니다. 그리고 자신을 규정해줄 무언가를 주길 바라지요.


예를 들면

저 뭐 그려야 할지 모르겠는데, 추천해주세요!
캐릭터 뽑아서 그려도 되나요?
선생님 생각 안 나는데 그냥 다음 진도 나가면 안 돼요? 저는 자유 그림 싫어요.


간혹 한참을 딴짓하다가 누워버리는 친구들도 있습니다. 이런 질문을 받을 때면 솔직히 민망하고 안타깝습니다. 우리 아이들이 왜 이렇게 되었을까 생각해보죠. 누군들 처음부터 이랬을까요? 우리 어렸을 때 보면 종이 한 장만 있으면 몇 시간이고 앉아서 그리는 게 그리 어려운 일이 아니었습니다. 좋은 재료가 뭐고, 규칙이 뭐고, 잘 그린다는 게 뭐예요. 그냥 마음 내키는 대로 그리는 거죠.


당당하게 벽에도 그리고, 종이 좀 넘어가서 바닥에다 칠해서 엄마한테 엉덩짝 두들겨 맞기도 하고 그랬는걸요. 심지어 어른들은 알아보지 못하는 낙서를 가지고 가서 이건  모자고 사탕이라면서 자랑했죠. 그 시절에 저희들은 매일이 신기하고 궁금한 것 투성이었습니다. 그리고 날마다 무언가를 그리고 싶은 게 있었어요.






자유도 자유를 느껴본 사람만이 지킬  있다고 합니다. 자유를 경험해보지 못한 사람들은 자유가 와도 이것이 자유인지 모르고 낯선 마음에 거부하게 되죠. 나이가 들수록 낯설고, 내가 경험해보지 않은 것들에 새로 도전하기는 쉽지 않죠. 그러니 한두  시도해보고 멀리하기보다 낯섦이 주는 감정을 조금씩 받아들여보면 어떨까요? 그러다 보면 어느새 낯섦은 익숙함이 되고, 쳇바퀴 굴러가던 나의 삶에 새로운 지평을 열어줄 거라 생각합니다.

다만 처음에는 쉽지 않을  있어요. 그래서 처음 그림 그리기를 시작하는 분들께 '그림일기' 추천합니다.


'그림일기'

그날의 키워드가 되는 감정, 사람, 사물 등의 키워드를 정합니다.
한 줄 글과 함께 드로잉을 합니다.


예를 들어 오늘 저는 피곤했던 날이라 커피 3잔을 마셨어요. 그래서 저는 키워드를 '커피 3잔'으로 하겠습니다. 아이스 아메리카노, 아인슈페너, 에스프레소 이렇게 3잔 마셨으니까요. 생각나는 대로 그려볼게요. 혹시 이때 외향이 생각나면 그냥 그리시고, 기억이 잘 안 난다 싶으시면 검색하고 보고 그리셔도 됩니다. 대신 똑같이 그리는데 초점을 맞추지 않으시면 좋습니다. 그리고 앞서 말씀드린 것처럼 종이에다 볼펜으로 쓱쓱 드로잉을 했습니다. 그리고 2022. 5. 31  '오늘도 커피 세 잔. 날마다 느는 건 나이와 카페인' 이렇게 적었어요.



쓱쓱 그리기


쭉 그리니 5분 정도 지난 것 같아요. 그날의 날짜와 장소,   을 함께 기록하면 그림일기가 되기도  하고요. 이렇게 매일, 혹은 기분  때마다 그리다 보면 하루가  ,  년이 수년이 되어 나의 자랑스러운 취미가   있을 거예요. 그리고 이렇게 그려진 그림들은 나의 포트폴리오(작품집)   있는데요. 포트폴리오 작업이 특별한 누군가만   있는 그런  아니어서요.  쓰는 파일에 내가 그린 그림들을 차곡차곡 모아 두시는 것이 시작입니다.




https://brunch.co.kr/@gamlim/26



매거진의 이전글 그림 그릴 준비 해볼까요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