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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간단남 Jul 17. 2023

癸卯년 己未월 두 번째 기록

[주간단남] 7월 2주차

[주간단남] 시리즈에서는 제가 매일 아침 50분 가량 글명상을 했던 내용을 찬찬히 살펴보고 나누고 싶은 내용을 공유합니다.

발췌한 문장들은 제가 적었던 문장을 수정하지 않고 그대로 가져오는 것입니다. (맞춤법 오류, 비문 등 많을 수 있음)

굵은 글씨로 표시한 문장은 제가 새롭게 깨달았거나 꽂혀 있는 '생각'을, 밑줄 친 문장은 '행동'이 필요하다고 느낀 부분을 표기했습니다.



무의식은 언어적 표현을 통해 의식적인 것이 될 수 있습니다.

페터 비에리, <자기결정> 中






23.07.10 (월)


(..)

요즘 뜸을 게을리해서 그것의 빈자리가 느껴지는 것일까? 장마철에는 습해서 비장의 기능이 떨어지기 쉽다고 한다. 비장은 오행상 토에 속하고 육기론에 따르면 토는 습한 기운에 배속이 된다. 안 그래도 습한 기운에 습기가 가중되면 좋진 않겠지. 실허의 관점에서 본다면 허보다는 실에 가까우려나.


(..)

막노동 같은 육체노동은 근비대 및 근지구력 훈련에 가깝겠단 생각이 든다. 본인이 겨우 몸을 가눌 정도의 무거운 것을 들면 속도도 떨어질뿐더러 위험하기 때문에 적당 선의 무게를 반복해서 나르고 하는 과정이 딱 근비대/근지구력 훈련과 닮아있다.


(..)

안일한 생활은 접자. 대신 쫓기는 생활도 안된다. 호흡을 가다듬고 매일 감사와 여유가 넘치는 감정 상태, 재미와 흥분의 연속인 상태. 평화 그 자체인 상태로 살아가자. 오늘도 이렇게 새롭게 주어진 또 하루에 감사해 마지않으면서 말이다. 근데 그러려면 글씨부터 천천히 써야 하지 않겠니?ㅎㅎ




23.07.11 (화)


(..)

인간의 뇌는 자신이 예측한 것을 얻어내는 능력이 있다고 한다. 우리가 물을 마시면 그 수분이 혈류까지 공급되는 데에는 약 20분이 걸리는데도 마시자마자 갈증이 해소됐다고 믿는 게 뇌의 그러한 작용 탓이다. 경험을 통한 앎 때문에 무의식적으로 행동과 동시에 결과를 예측했기 때문이다.


(..)

일체유심조라는 지극히 오래되고 경험적으로도 증명된 진리에 가까운 내용에 대한 과학적 재증명이 요즘 과학계에서는 화두인 걸까?


현대 문명을 살아가는 개인들은 마치 위생관념이 까탈스러운 결벽증을 가진 사람마냥 과학이 증명해 준 것만 선택적으로 믿는 경향이 있다. 어떤 것의 실체나 실재 그 자체보다 과학적으로 증명이 됐느냐의 여부만을 보기 때문에 어제의 거짓이 오늘의 진실이 되기도 하는 웃지 못할 해프닝이 다반사다. 그렇다고 한들 그들의 삶에 문제 될 건 전혀 없다.


이렇듯 삶이란, 실은 실재하는 진실이나 진리와는 무관한 것일지도 모른다. 우리 모두가 각자만의 우주 속에서 각자만의 시선으로 각자의 우주와 교류하기 때문이다. 우린 결코 내 눈앞의 상대를 온전히, 있는 그대로 볼 수 없다. 반드시 각자가 처한 상황이나 생각, 감정 상태를 부지불식간에 상대에게 투사하며 상대를, 세상을 바라볼 따름이다.


(..)

진정한 사랑은 분노가 아니라 연민에서 비롯된다. 분노를 도구로써 사용할 때조차도 마찬가지다. '저건 잘못된 거야!'라며 바로잡고 싶고 더 나아가 상대의 잘잘못을 따지고 싶다는 욕구에서 비롯된 분노는 이미 연민과 보호의 도구가 아니라 폭력과 응징의 도구로 전락한 뒤다. 


보호 욕구는 상대를 위한 마음이 우선이지만, 응징 욕구는 나를 위한 욕구에 불과하다. 상대가 틀리고 내가 옳다는 걸 증명하고 싶다는 욕구의 도구. 잘못됐음을 논리적으로 증명하고 싶다는 욕구. 그러나 더 나은 방식은 표면에 드러난 어떤 현상, 사건, 상대의 언행 등에 주목할 것이 아니라, 그 안에 서린 욕구가 무엇일지 헤아려보는 것이다. 그게 NVC에 가까운 방식이리라.


(..)

언제나 드러나는 현상보다 그 안에 담긴 의도가 더 중요하다. 업종이 중요한 게 아니라 임하는 마음이 중요하다. 신도들의 돈을 삥땅치는 성스러운 종교 지도자와, 삶의 소명 따위는 모르겠고 매일 돈 버느라 바쁘지만 배고픈 사람들을 위해 마진을 최소화하는 식당 주인 중 누가 더 성스럽고, 누가 더 세속적이라 할 수 있을까?


(..)

나는 끈기나 한결같음, 그리고 스스로 무엇인가를 왜 하는지 잘 안다는 것에 대해 자신감이 있다고 생각했다. 그래서인지 그것에 대해 누가 가타부타 얘기를 하면 방어기제가 생긴다. 그런데, 정말 그러한가? 방어기제는 어딘가 빵꾸가 나 있다는 반증이다. 그건 자신감이 아니라 자만감이고 오만함이었다. 진짜 자신감은 여유를 동반하고, 가짜 자신감, 자만심과 오만은 조급함과 방어적 태도를 동반한다.




23.07.12 (수)


(..)

자신이 닮고 싶은 감정 상태를 그 사람이 현재 지니고 있는지 보자. 순간적인 감정이라기보다는 그 사람에게서 나오는 일종의 기운이나 아우라 말이다. 나의 경우 그 사람이 내가 바라는 상태인 초연함과 여유로움, 안정된 정서 상태에서 묻어 나오는 바이브를 지니고 있는지를 본다. 그게 느껴지지 않는 사람의 말은 경계해서 들으려고 한다. 말의 내용보다 그 사람이 지닌 에너지를 보라. 말은 누구나 그럴듯하게 할 수 있지만, 에너지는 꾸며낼 수가 없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나머지 사람들의 말을 내가 배척하고 귀담아듣지 않아도 된다는 말은 아니다. 주변의 조언을 감사히, 넙죽 받되, 그것을 따라줘야 할 것 같은 부담감에 시달릴 필요는 없다. 또한 그 사람이 초연해 보이지 않는다고 하여 업신여기거나 그의 말들에 자신이 원래 가졌던 신뢰를, 그게 원래 어느 정도였건, 거두어 버리는 오만함을 일삼지 않아야 한다. 그런 태도 역시 초연함과는 거리가 멀기 때문이다.


초연함은 느긋하고 여여하다. 자신이 가고자 하는 방향 설정만 해둘 뿐, 그것이 이뤄지는 과정에서 펼쳐지는 매일의 광경은 마치 TV 드라마를 보듯 편안히 감상할 줄 아는 태도다. 거기에서 비롯되는 감정들을 각각 온전히 느껴주며 머물 줄 알되, 그것이 드라마뿐임을 알면 그 이상의 몰입이 되지 않듯이, 감정에 지나치게 사로잡혀 버리지만 않으면 된다. 




23.07.13 (목)


(..)

요즘 드는 이 바닥의 치열한 경쟁에 대한 생각이 그런 꿈을 꾸게 했나 보다. 최근에 들은 말이 생각이 났다. 사람들은 어차피 한 곳에서만 머물며 콘텐츠를 소비하지 않는다고. 그들은 관련된 콘텐츠들을 계속 보면서 인터넷이라는 무한한 바다를 유영할 뿐이라고. 그렇기에 같은 업종에 나 아닌 다른 사람이 이미 잘 하고 있는데 뭐 하러 또 새롭게 뛰어드나 하는 걱정은 쓸데없는 기우일뿐이라고.


사람은 누구나 각자의 고유 색채를 지니고 있다. 그렇기에 남들 다 하는 기본만 갖춰도 그것이 고유성과 어우러져 자신만의 개성으로 드러나게 된다. 단, 그러기 위해서는 오히려 개성이 아니라 기본기에 충실해야 한다. 개성은 이미 갖췄는데 뭘 더 배우려 하나. 배워야 할 것은 기본기이다.



23.07.15 (토)


(..)

그냥 별생각 없이 일어나서 소변을 보다가 그냥 문득 더 뒹굴고 싶어 하는 '익숙한' 생각 너머로 아침 사색에 대한 욕구가 올라옴을 느낄 수 있었다. '모닝 페이지를 꼭 써야지!' 했던 것도 아닌데 이러는 것을 보면 우리 삶에는 보이지 않는 어떤 흐름이나 때에 관한 분기점 같은 게 존재하는 것 같다.


(..)

어느 유튜버의 말처럼 흘려보내서 없애버려야 할 대상이라 여기는 순간, 즉 그것을 그대로 보는 부드러운 시선이 아니라 분별심을 갖고 판단과 비판과 분석의 시각을 갖기 때문에 오히려 더 붙들고 있느라 흘려보내지 못하는 모순을 범하게 된다. 힘을 빼라. 그게 중요하다면 더더욱.




23.07.16 (일)


(..)

개인의 일상을 공유하는 계정은 한계가 있다. 메인 테마가 있고 거기에 일상을 곁들여야 성장을 위한 계정으로서 의미가 있다. 그렇지 않다면 일상 자체가 독특한 개성이 있거나 혹은 일정한 형태의 루틴이 있어 그 자체가 하나의 콘텐츠가 되는 식이거나. 그냥 남들 살듯 똑같은, 그런 일상은 오히려 그 당사자가 비범한 사람이거나 일반적이지 않은, 영향력이 상당한 사람일 때 특별한 가치를 지닌다.


물건이든 콘텐츠든 희소성과 특별함을 느낄 수 있도록 해야 관심을 얻는다. 그게 자기 자신과 대중의 니즈가 겹치는 지점이 되리라. 대중의 관심사로만 눈을 돌리다 보면 나를 잃고, 나에게만 시선을 두다 보면 지나치게 마니악한 외골수가 되기 십상이다. 무엇이 안 그러겠느냐마는, 역시 여기에서도 중용의 미덕이 요구된다.


중용은 A도 B도 다 가지고 싶어 부리는 욕심이 아니요, 어느 쪽에서도 실패하기 싫은 두려움도 아니며, 결정을 회피하는 비겁함도 아니다. 그것은 오히려 둘 모두를 살필 줄 아는 열린 마음, 넓은 시선에 가깝다. 천착보다는 조망하는 것. 


그렇기에 중용은 평온한 마음 상태의 자연스러운 결과물에 지나지 않는 것일지도 모른다. 그 자체가 목적이 되면 중용인지 아닌지에 골몰하느라 스스로를 괴롭힐 것이다. 평온함 역시 마찬가지다. 지향함과 동시에 얽매이지 않는 무위의 정신이 필요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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