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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간단남 Jul 24. 2023

癸卯년 己未월 세 번째 기록

[주간단남] 7월 3주차

[주간단남] 시리즈에서는 제가 매일 아침 50분 가량 글명상을 했던 내용을 찬찬히 살펴보고 나누고 싶은 내용을 공유합니다.

발췌한 문장들은 제가 적었던 문장을 수정하지 않고 그대로 가져오는 것입니다. (맞춤법 오류, 비문 등 많을 수 있음)

굵은 글씨로 표시한 문장은 제가 새롭게 깨달았거나 꽂혀 있는 '생각'을, 밑줄 친 문장은 '행동'이 필요하다고 느낀 부분을 표기했습니다.



무의식은 언어적 표현을 통해 의식적인 것이 될 수 있습니다.

페터 비에리, <자기결정> 中






23.07.17 (월)


(..)

우린 종종 좌절감에 스스로를 책망하느라 주어진 상황에서 취해야 할 가장 효과적인 행동에 필요한 에너지를 내지를 못하곤 한다. 지나간 시간에 대한 분석은 의식적인 노력을 기울여 따로 시간을 내는 것이 아니라면 지양하는 게 좋다. 초점은 현재에 두는 것이 평정심을 유지하는 관건이기 때문이다.

(..)

둘이 함께 숨 쉬는 한 공간에서 각자의 펜이 종이와 만나 내는 사각거리는 소리, 그리고 이따금씩 들려오는 아침 새소리에 몸과 마음이 서서히 의식의 빛으로 차오르는 것이 느껴진다. 이는 물리적인 존재로 비한다면 생명을 잉태한 양수와도 같다. 정신적 에너지가 충만한 이 기분. 그런 상태에 놓인 지금 이 순간을 오롯이 즐기는 이 느낌이 참으로 좋고 또 감사하다.

(..)

인간이 끊임없이 자신을 부풀리는 이야기들을 나열할 때, 그건 자신 안의 어떤 두려움, 외면하고 싶고 가리고 싶은 어떤 것을 드러내지 않기 위함일 때가 많다. 옷을 언제나 화려하게 입거나, 문신으로 온몸을 뒤덮거나 항상 수다로써 내면으로서의 침잠을 스스로 가로막거나 하는 등. 외부에 힘을 지나치게 주다 보면 내부는 부실해질 수밖에 없는 게 자연의 이치다. 이건 반대의 경우에도 적용된다. 그저 경청이 좋다고 하니까 남들의 얘기를 억지로 꾸역꾸역 들으며 내면의 표현 욕구를 억누르는 것 역시 건강하지 못한 건 매한가지다.




23.07.18 (화)


(..)

웅장함 앞에선 겸허하고 초연해진다. 내가 우주의 관점에서는 쌀 한 톨보다도 작은 존재이고 이건 옆 나라 재벌 총수도 마찬가지라는 사실은 세상사를 좀 더 초연하게 바라볼 수 있도록 만든다. 반면에 여유와 사랑은 편안함과 안심을 느끼게 해준다. 믿음이, 신뢰가, 그리고 그것을 넘어 그저 아는 것은 불안과 공포로부터 벗어나 앎의 영역에 도달하게 해주는 것이다. 

이 둘은 그저 하나의 달을 가리키는 서로 다른 손가락에 지나지 않는다. 중요한 건 손가락들도 늘어났지만, 애초에 달이 아닌 엄한 곳을 가리키며 달이라 말하는 자들도 대폭 늘었다는 점이다. 이럴 땐 그 사람이 내세우는 정보나 이력이나 언변에 주의를 기울일 게 아니라, 그 사람이 자아내는, 뿜어내는 기운을 느껴보려고 해야 한다. 기운은 거짓말을 하지 않는다.




23.07.19 (수)


(..)

물을 잔뜩 머금은 채 수분을 나눠 줄 다른 나무를 찾는 나와 수분기가 더 필요한 무성한 나무인 내 짝은 결국 함께 서로를 격려하며 봄의 절경을 만들어야 할 사명(?)을 가지고 태어난 걸지도 모른다. <데미안>에 나왔던 말처럼 우리는 우리만의 '섬'을 만들어 새로운 가능성을 세상에 선보일 것이다. 자기 내면의 울림을 나침반 삼아 나아가는 주체적인 삶, 그런 삶 역시 충분히 가능하다고 말이다. 

(..)

어떠한 얘기를 상대에게 했을 때, 설령 그게 나에겐 영감을 던져준 것이라 해도, 상대가 반응이 딱히 없을 수 있다. 그때 실망감이 든다면 그건 의식의 초점이 상대의 안녕이 아니라 자기 자존감이나 효능감의 충족에 있었다는 반증이다. 

자기 조언이 반영되지 않았을 때 좌절감, 심하면 분노에까지 휩싸이는 것 역시 마찬가지로 자기중심적이고 이기적인 성향의 발로에 지나지 않는다. 자신이 주변 사람들과 세상을 있는 그대로, 나와는 다른 엄연한 독립된 자유로운 주체자로 보는지 되물어볼 필요가 있다. 주변 사람이나 환경 때문에 자신이 부정적 감정에 휩싸였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주변을 스스로를 위해 존재하는 도구로 여기는 것이다.

그러니 언제나 스스로를 잘 살펴라. 세상을 본인 입맛대로만 주무르려는 찰흙으로 여기고 있지는 않은지. 그런 사람들의 전형적 특징 중 하나는 정작 본인은 타인의 간섭을 싫어한다는 점이다. 내로남불은 독이다. 내가 원하는 게 있다면 남들에게 먼저 그걸 주고, 내가 싫어하는 게 있다면 남들도 똑같이 그걸 싫어할 거라 생각하라. 여기서 실제로 그러한지는 중요하지 않다. 설령 그가 그걸 원치 않든, 혹은 그걸 싫어하지 않든 중요한 건 자기 내면에 모순과 이기심이 생기지 않도록 하라는 것이다.

(..)

목이 뻐근하다. 책상하고만 너무 친하게 지냈다는 뜻이다. 하늘을 쳐다보자. 낮이든 밤이든 그저 하늘을 쳐다보는 시간을 의식적으로 가져보자. 의식적인 멈춤. 그리고 그 경험의 순간에 온전히 머무르는 것. 그게 살아있음을 느끼는 방식 중 하나이고 주변의 환경과 내가 조화를 이루며 한바탕 춤을 추는 것과도 같다.




23.07.21 (금)


(..)

육체 보다 우선인 건 정신이다. 일어나겠다고 강하게 결심을 먹는 것과 그렇지 안은 것에는 드러나는 결과에 있어 커다란 차이가 있다. 물론 강한 결심이 집착하는 마음과 같지 않다는 것 또한 염두에 둬야 한다. 자신이 생각하고 상상하는 대로 판은 짜여진다.

(..)

조작될 수도 있는 후기/리뷰보다도 사람들에게 신뢰감을 줄 수 있는 영역이 자신을 따르는 사람의 수, 아니 그 수의 많고 적음보다도 우선인 건 존재 여부가 아닐까. 수는 그다음이고. 생각해 보면 그렇다. 그러니 팔로워 수가 곧 영향력이요, 개인 혹은 브랜드의 능력과 신뢰도를 가늠하는 지표 중 하나가 된 것도 지극히 당연한 현상이다.

물론 그건 어디까지나 그것이 존재하는 원래 이유를 생각했을 때의 얘기일 뿐, 그것이 자연스러운 결과물이 아니라 목적 자체로서 기능할 땐 얘기가 달라진다. 신뢰를 쌓음으로써 그에 따른 결과로 자연스레 추종자가 느는 게 아니라, 추종자의 수를 거짓으로라도 일단 부풀려서 그게 신뢰감을 만들도록 하려고 할 때 주객은 전도되고 그것이 본래 지니던 가치는 퇴색되어 사라지고 만다. 얼마나 많은 것들이 주객전도 속에서 그 가치를 잃어갔는가.

뭐든 좋다고 하면 일단 그것의 껍데기부터 두르고 보려는 게 요즘 사람들의 마인드다. 그것은 자본주의 내에서 특정 시장의 활성화는 가져올지 모르나 개개인의 삶을 본질에서 더욱 멀어지게 만들어 공허한 삶이라는 종착지로 이끈다. 본질은 주객이 전도되지 않게 하는 것이다. 주객이 전도되지 않는 것은 본래의 흐름에 왜곡을 발생시키지 않는 것이다. 

몸이 건강해서 탄탄해지면 바른 방식이나, 일단 탄탄해지고 보자는 마음에 무작정 몸을 혹사시키는 건 본질의 왜곡이다. 이 모든 건 지나치게 조급한 마음과 타인의 시선을 의식하는 마음에서 비롯된다. 그런 마음은 언제나 자본시장에서 노예의 삶을 살 수밖에 없도록 만든다. 시류에 휘둘릴 수밖에 없는 정신적 노예 상태 말이다.




23.07.22 (토)


(..)

Chat GPT에 의존하면 자립능력을 잃고 말 것이다. 일을 맡길 줄 아는 건 스스로 자립할 자질이 될 때의 얘기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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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유가 될 때, <육친 퀴즈>를 명리 퀴즈로 바꿔서 12운성과 삼합에 대한 내용도 훈련할 수 있게 기능을 추가해야겠다. 도메인도 사둘까나. 홈페이지를 그럴듯하게 꾸며두면 구글 애드센스도 달 수 있을지도 모른다. <명리 독학> 또는 <명리 도사>라는 이름으로 사용자가 그 도사에게 감히(?) 퀴즈를 내지만 그 도사는 홀연히 다 맞히는... 아니 그 도사가 우리에게 내고 시간이 지나면, 혹은 정답 확인을 누르면 대답을 하는 형태가 낫겠구나. 재밌는 컨셉이다. 틈틈이 작업을 해서 8월~9월 중엔 애드센스도 신청해 보자. 상상만으로도 벌써 흥미진진하구나 크크.




23.07.23 (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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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런저런 걱정이나 우려가 들다가도 이런 게 결국 삶 아니겠나, 하는 생각이 든다. 멀리서 보면 비극이 되기도 하고 가까이 보면 희극이 되기도 하는 인생이란 반드시 이러저러한 복잡다단성을 지닌다. 그 리듬과 흐름을 바라보는 태도가 그 진동폭이 자아내는 파동의 형태를 결정짓는다.

(..)

삶이란 게, 내가 뻘밭에서 굴렀다고 해서 내가 그곳에서 나갈 차례가 왔을 때 남들은 다시 뻘 속에 구르러 들어가야 할 순번 게임이기를 바라지 않는다. 흔히들 비유하듯 의자 뺏기 게임, 제로섬, 치킨 게임으로 세상을 보지 않으면 분명 더 나은 돌파구가 있지 않을까. 나는 그 가능성에 투자하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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