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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간단남 Jul 31. 2023

癸卯년 己未월 네 번째 기록

[주간단남] 7월 4주차

[주간단남] 시리즈에서는 제가 매일 아침 50분 가량 글명상을 했던 내용을 찬찬히 살펴보고 나누고 싶은 내용을 공유합니다.

발췌한 문장들은 제가 적었던 문장을 수정하지 않고 그대로 가져오는 것입니다. (맞춤법 오류, 비문 등 많을 수 있음)

굵은 글씨로 표시한 문장은 제가 새롭게 깨달았거나 꽂혀 있는 '생각'을, 밑줄 친 문장은 '행동'이 필요하다고 느낀 부분을 표기했습니다.



무의식은 언어적 표현을 통해 의식적인 것이 될 수 있습니다.

페터 비에리, <자기결정> 中






23.07.24 (월)


(..)

의식이 깨어나자마자 기다렸다는 듯이 생각의 파도가 밀려들어오기 시작한다. 그 맹렬한 흐름을 뒤로 한 채 일어나 양치를 하고 세수를 한다. 후두부와 신장 부위를 9번씩 총 6세트씩 두드려 정신과 몸을 한껏 더 깨우고 기지개와 스트레칭을 하고 물을 한 컵 정도 마신다. 책상에 앉아 모닝페이지를 꺼내고, 시작 전에 침을 놓는다. 오늘은 늘 놓는 백회와 중완에 더해 족삼리와 태충에도 침을 추가했다. 장마철에 약해진 비장 위장의 기능을 북돋기 위함이다.


(..)

자동차는 노후되면 자연스레 이곳저곳 정비할 곳이 생긴다. 이때 차주는 차에 대한 최소한의 관심과 애정을 바탕으로 본인의 차 상태와 그에 따른 필요 조치에 대해 알고 있어야 한다. 모든 것을 정비사에게 다 맡겨버리고 돈만 내면 되는 게 아니라. 


인간의 몸도 마찬가지다. 우리가 의사나 한의사에 버금가게 이론과 지식을 갖출 필요까진 없다. 그러나 신체의 작용과 신체에 투입되는 음식과 영양에 대한 기초적인 지식은 갖춰두는 것이 인체에 대한 애정과 예의요, 삶에 대한 사랑이 되겠다.


자신의 삶을 사랑하는 만큼 그 삶을 경험하게 해주는 육체에 대한 관심과 관리를 투입해야 한다. 다른 말로 삶을 어떻게 사랑하느냐 묻는다면 육체를 사랑으로 가꿔보고, 정신을 가꿔보라 말하고 싶다. 반대로 자기 몸과 마음을 비롯한 자기 자신을 어떻게 사랑하느냐 묻거든 삶 자체를, 매일의 일상에서 경험하는 모든 순간들에 보다 애정을 가지고 머물러 보라고 말한다. 


(..)

무탈한 미래는 무탈한 마음, 텅 빈 초연함에서 얻어진다. 애쓰고 투쟁하지 말라. 투쟁은 겉으로 드러나는 행동이 아니라, 그런 행동에 임하는 자신의 마음 상태에 달려 있다. 호흡하자. 알아차리자, 가만히 바라보자. 에너지의 균형 상태가 이끄는 자연스러운 흐름에 몸을 내맡기자. 그리고 동시에 그런 흐름을 읽어낼 줄 아는 직관과 안목을 기르자. 


(..)

세상을 뒤집고 개혁하는 방식이 아니라, 물처럼 아래로 흘러 흘러 사람들 속으로 가겠다. 한 명 한 명씩 의식의 초점이 현재에 맺히게끔, 각자 본인들이 이 생에서 잠시 기거하게 된 육체와 내면의 빛을 사랑할 수 있게끔, 삶을 사랑하게끔, 희망을 잃지 않게끔 하겠다.


삶을 전쟁과 투쟁, 생존을 위한 살얼음판을 걷는 지옥이라 여기지 않아야 한다. 축제처럼, 게임처럼, 겸허히 최선을 다하되, 애쓰고 골몰하지 않기를, 이따금씩 힘이 잔뜩 들어갔다가도 이내 알아차리고 평온함을 되찾을 수 있기를. 나뿐만 아니라 보다 많은 이들이 내면에 머무는 자신만의 빛을 찾는 여정을 시작하기를 바라며 나만의 방식으로 나아가겠다.



23.07.25 (화)


(..)

벌써부터 반사적으로 내 안의 검열관이 왜 그렇게 하면 안 되는지에 대해 일장 연설을 늘어놓으려는 게 느껴진다. 그럼 더더욱 해야지. 모닝 페이지에서만큼은 검열관의 잔소리를 철저히 무시하고 그의 구시렁거리는 조언과는 반대로 나아감이 길하다.


실제 삶에서도 의외로 그렇지만 모닝 페이지보다 삶 자체가 더 중요하다고 여기기에 무게감이 달라져 쉽지 않을 따름이다. 중요성을 낮추는 것, 그게 물론 내용은 좋지만 쉽지 않다. 외나무다리를 1m 높이에 설치하는 것과 50m 낭떠러지에 설치한 것은 건너는 사람 입장에서는 두려움의 크기에 어마어마한 차이가 있다.


그러나 그 두려움은 극복 가능하다. 위험천만한 서커스 묘기를 선보이면서 평정심을 유지하는 곡예사들을 떠올리면 알 수 있다. 그 비밀은 익숙함에 있다. 숱한 연습을 통해 스스로에 대한, 결과에 대한 그런 믿음. 그리고 믿음을 넘어 그저 앎의 단계에 이르면 자연스럽게 평정심을 유지할 수 있는 단계로까지 나아가는 것이다.


(..)

목기, 화기가 없는 나는 상대가 서운함을 느껴야만 그제야 알아차리고 행동에 옮긴다. 미리서부터 그것을 예상하고 대처하는 데에 둔하다. 그 덕분(?)에 정서적으로는 안정된 상태에 머무는 편이며, 타인의 시선을 크게 신경 쓰지 않는다. 다만 이러한 내 특성이 누군가에겐 무심함으로 비칠지도 모른다. 내 마음은 그런 게 아닌데.


그래서 나는 '말하지 않아도 알아요.'라는 초코파이의 말을 정면으로 반박한다. 커뮤니케이션이란, 명확하면 명확할수록 좋다. 물론 방점을 어디에 찍느냐에 따라 다르겠지만. 이권을 챙기고 체면을 차리기 위해 자행되는 온갖 협상이니 밀당이니 하는 것들에 나는, 도구로써 이따금씩 그것이 필요하다고만 여기뿐이지, 의사소통의 본질과는 한참 멀어진 방식이라고 생각한다.


이러한 기법들은 한정된 자원을 두고 어떻게 하면 내가 원하는 걸 얻으면서도 상대는 자신이 원하는 걸 얻었다고 '착각'하게 만들까 하는 이기심에서 비롯된 것이라 생각한다. 경제학에서는 물물 교환을 예로 들며 서로가 필요로 하는 걸 얻는 윈윈인 것처럼 단순 묘사하지만, 실제 삶은 교과서와는 다르다. 의도를 숨기기 때문이다.


가령, 쇠가 많아서 넘치는 나라와 곡식이 많은 나라가 서로 곡식과 쇠를 교환한다고 치자. 서로에겐 이미 넘쳐서 가치가 낮지만 상대에겐 귀해 가치가 높은 것이니 윈윈이라 할 수도 있다. 그건 의도를 보지 않고 피상만 살피기 때문이다. 


곡식이 많은 나라의 숨은 목적이 쇠를 차곡차곡 모아서 '쇠국'을 침략할 무기를 개발하는 것이라면? 반대로 쇠국 역시 '곡식국'의 곡식을 모아 연구를 통해 '몬산토Monsanto'처럼 씨앗을 팔아 되려 자신들에게 종속되도록 만들려는 의도를 가지고 있다면? 그게 과연 윈윈이 맞나?


(..)

황금알을 낳는 거위를 보면 감지덕지할 줄 모르고 결국 배를 갈라버리고야 마는 게 인간의 본능이다. 본능대로 움직이는 사람들이 많은 단계에선 서로 간의 조건 없는 신뢰란 불가능에 가까운 것이다. 그래서 법과 같은 제도적 보완이 요구된다. 그러나 그건 어디까지나 지배층들이 인간을 한낱 짐승과 다를 바 없는 존재로, 자신들 또한 그와 다를 바 없으면서, 보기 때문이다. 


만일 모든 인간이 스스로의 내면을 살피고 끊임없는 수양을 거듭한다면? 스스로의 내면에 깃든 신성을 일깨운다면? 그런 법과 시스템을 만드느라 애썼던 시간들이 무색하다고 여겨질 만큼 상호 간의 사랑과 믿음과 신뢰가 되살아날 것이다. 처벌과 강제성 그리고 제도적 보상이 없으면 인간을 통제할 수 없다고 보는 건 스스로 인간은 존엄이 없는 존재로 보는 것과 매한가지다. 


존엄성을 논하는 기준이 준법정신이 되는 게 맞을까? 존엄하다는 걸 준법정신이 투철한 걸로 증명하려 들 필요가 없도록 내면을 바라보는 사람이 되어야 할 것이다.


(..)

하기로 했으면 눈을 좌우로 돌리고 짱구를 돌려가며 집중력을 잃는 대신 그냥 해라. 대인의 사고는 단순하고도 기다. 소인은 복잡하고도 얕다. 나는 이런 대조법을 좋아한다. 가치의 양극단을 비교함으로써 자연스레 내가 방점을 어디에 찍을지가 명확해지기 때문이다.


(..)

가치란 주관적인 것이다. 객관이란 것도 주관이 서로 뜻이 맞아 한 데 뭉친 일시적 타협일 뿐, 절대적 객관이란 존재하지 않는다. 적어도 인간사에서는 말이다.




23.07.26 (수)


(..)

NVC에서 말하는 연민의 상태는 상당히 수준 높은 경지다. 그것은 상대를 온전히, 있는 그대로 바라보고 있다는 것과 동의어다. 흔히 연민하면 떠올리는, 난민 구호자금 모금 캠페인을 볼 때 우리가 연민이라 착각하는 그런 감정을 떠올리지만 그건 대부분 거짓 연민이다.


그건 오히려 동정에 가깝다. 자신은 그런 불행을 겪고 있지 않은 상황이기에 생길 수 있는 감정. 그것은 때로는 안도감과 감사함으로, 때로는 자신이 도움을 줄 수 있다는 위치에, 자신에게 그런 결정권이 있다고 생각하게 만드는 우월감으로 나타나기도 한다. 아니다. 그런 것들은 연민이 아니다. 남의 불행을 '시청'해서 쉽게 얻어지는 그런 감정은 연민과는 거리가 멀다.


연민은 '참나'의 상태에 도달하는 것에 비견할만하다. 고로, 우린 연민을 느끼기를 지향할 뿐, 그것은 텃밭의 사과를 따먹듯 그렇게 손쉽게 얻을 수 있는 게 아니다. 폭력과 갈등, 기대와 실망, 옳고 그름으로 온통 물들어 있는 이 세상에서 조건 없는 여여함을 가진 사람이, 그걸 최소한 지향이라도 하고자 하는 이들이 과연 얼마나 되는가? 오히려 모든 생명체는 본디 이기적인, 자기중심적 존재라는 명제 뒤에 숨어 자신의 현상태가 지극히 자연스럽고, 심지어 옳고 타당하다고까지 주장하는 사람들이 대부분이다.


그런데, 정말 그러한가? 참나는 수행의 경지처럼 느껴지지만 실은 한때 우리가 지니고 있었던 순수함을 회복하는 것에 지나지 않는다. 온갖 판단과 분석으로 내면에 각종 분별의 기준을 학습하고 오만과 편견 속에 사는 게 지극히 자연스러울 리 만무하지 않은가. 


(..)

감정에 선택의 여지는 바깥이 아니라 내 안에 있다는 사실을 믿지 않으면 인간은 결코 주체적 삶을 살 수 없다. 끊임없이 외부 환경과 주변인들의 작용에 자신의 감정의 관리 권한을 넘겨버리고 좋았다 싫었다를 반복하며 죽을 때까지 살아갈 것이다. 


(..)

판단 자체가 죄악이 아니다. 판단은 판단일 뿐인, 가치 중립적인 존재다. 문제는 관계 속에서 일어나는 모든 근본은 결국 감정과 그 이면에 감춰진 욕구를 발견하는 것에 있음에 동의한다면, 판단만을 도구로 쓸 때는 변죽을 울리고 되려 반작용에 의해 튕겨져 나가게 된다는 것이다. 차라리 그 모든 분석력의 시선을 시비분별이 아니라 눈앞의 상대의 감정을, 그리고 그 뒤에 숨은 욕구를 같이 찾아보는 데 힘쓰는 게 낫다. 


물론 나에게 그걸 찾아줄 의무 같은 건 없다. 다만 조력자나 보조자의 입장에서 같이 들여다볼 뿐이다. 이 과정은 결코 필수가 아니다. 필요하다면 부탁할 일일 따름이다. 있어서 좋은 것은 감사할 존재다. 그런데 없어서 짜증이 난다면, 서러움이 든다면, 그건 내가 그것을 당연시 여기고 마땅히 상대가 나에게 줘야 하는 것으로 여기고 있었다는 방증이다.




23.07.28 (금)


(..)

무엇이 좋고 나쁜 게 따로 있는 게 아니라, 어떠한 특성과 특정 조건 간의 만남에 여러 조합이 있을 뿐이고, 그에 따른 여러 결과가 존재할 뿐이다. 내가 원하는 조건이 있다면, 처한 환경이나 그 밖의 다른 조건을 살핀 뒤 어떤 특성을 발휘해야 할지를 생각해 봐야 한다.


(..)

일례로, 내향성과 외향성은 옳고 그름의 문제가 아니다. 개인주의와 집단주의 역시 마찬가지다. 그러나 우린 너무나도 쉽게 옳고 그름을 진리에 가깝게 신봉하는 '시시비비 교'의 열혈 신도가 되고 만다. 더욱 웃지 못할 점은 그러한 시비분별의 근거가 대부분 개인의 경험에서 비롯된 지극히 주관적인 믿음, 더 적나라하게 말하면 선입견에 가깝단 것이다. 


그럼에도 그러한 기준들이 상식적이고, 일반적이고, 객관적일 거란 착각에 쉬이 빠진다. 설령 자기가 착용한 색안경이 주관적 기준임을 인지하고 있다 해도 여러 주관적 기준 중에 자신이 가진 도덕적 판단의 기준이 더 상위 레벨에 있다고 믿는다. 그래서 쉽게 화를 낸다. 


쉽게 화를 내고 기분이 언짢아지는 사람은 자기만의 관점이 세상의 관점과 같다고 믿는다. 아니, 정확히는 같아야 마땅하다 여기는 것에 가깝다. 그런데 실제 삶이 펼쳐지는 양상이 그 기준에 부합하지 않을 때마다, 그게 삶에서는 당연한 일인데도 불구하고, 화가 나고 또 화를 낸다. 그렇기에 화가 많은 사람은 자기중심적 사고를 지닌 자들이다. 이 역시 잘잘못이나 옳고 그름의 명제가 아니다. 그러하다고만 말할 따름인 것이다.


나 역시 나만의 발작 버튼이 있다. 그런데 그건 나만의 버튼인 거다. 상대가, 세상이, 그걸 알고 의도적으로 그걸 누른다면 그건 악의가 있다고 볼 수 있겠으나, 대부분의 경우에는 그렇지 않다. 그럼에도 자기 버튼이 무슨 국제, 아니 전 우주 공식 '누르지 말 것' 인증이라도 받았다는 듯이 당당히 화를 내는 건 어찌 보면 미숙한 거다. 


감정 자체에는 죄도 없고, 옳고 그름도 없다. 미숙함 역시 죄가 아니다. 거기에도 옳고 그름이 없다. 다만 미숙함을 인정하지 않는 사람, 자신 안의 가치가 계속해서 객관적 진리라도 되는 듯하는 사람은 '내 기준'에서는 죄인이고 후안무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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