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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간단남 Aug 07. 2023

癸卯년 庚申월 첫 번째 기록

[주간단남] 8월 1주차

[주간단남] 시리즈에서는 제가 매일 아침 50분 가량 글명상을 했던 내용을 찬찬히 살펴보고 나누고 싶은 내용을 공유합니다.

발췌한 문장들은 제가 적었던 문장을 수정하지 않고 그대로 가져오는 것입니다. (맞춤법 오류, 비문 등 많을 수 있음)

굵은 글씨로 표시한 문장은 제가 새롭게 깨달았거나 꽂혀 있는 '생각'을, 밑줄 친 문장은 '행동'이 필요하다고 느낀 부분을 표기했습니다.



무의식은 언어적 표현을 통해 의식적인 것이 될 수 있습니다.

페터 비에리, <자기결정> 中






23.07.31 (월)


(..)

공부와 세상 파악하기를 동시에 하기란 어렵다는 생각이 든다.

그런데, 정말 그러한가? 현실을 배제한 이론가가 되려는 게 아니라면 누구나 현실에 적용할 공부를 좇기 마련이다. 설령 그것이 소위 말하는 '진리'라고 일컫는 형이상학적 개념일지라도 그것은 반드시 형이학적 영역에 고스란히 내려와 적용돼야만 한다. 수학 개념을 올바르게 익혔다면 실전 문제를 곧바로 풀 수 있어야 하듯이 말이다.

(..)

끌어당김의 법칙이라 일컫는 일체유심조의 관점과 주역이나 명리학 등 운명학에서 말하는 내용은 자칫 상충하는 것처럼 들리지만 실은 그렇지 않다. 

전자에서는 큰 방향과 목표를 세우고 그려내되, 구체적 과정까지 모두 자신이 그린 시나리오대로만 풀려가지는 않는다고 말한다. 반면에 후자는 운명의 큰 흐름이 정해져 있다 말하지만 그것의 최종적인 완성의 변수는 운명의 주인에게 달려있다 말한다. 

두 내용을 종합하면 결국 삶이란, 내가 밑그림을 그려나가는 것이다. 그리고 운명이, 정확히 말하면 어쩌면 전생의 내가, 아니면 이 생에 태어나기 전의 임시로 머무는 공간에서의 영혼 상태로 존재하던 내가 짜둔 설계도대로 그린 또 다른 밑그림과 서로 조화를 이뤄나가는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든다. 과거의 나와 현재의 내가 각각 날실과 씨실이 되어 만들어 내는 결과물이 미래의 내가 되는 것. 이것이 삶이고 운명이 아닐는지.

그렇게 생각하면 이유 없이, 의미 없이 내게 드는 생각과 감정은 없다. 나에게 일어나는 모든 일도 다 그런 커다란 밑그림의 일부다. 내가 그려나가고 있는 것이 그 그림이라면 나라는 존재는 그 붓의 머리에 해당한다. 나의 궤적이 곧 그림이고, 삶이라는 작품을 자아낸다. 그것을 그리는 주체를 신성, 참나, 영혼, 과거의 나, 어느 것이라 부르든 그 존재 또한 결국엔 나다.

그건 내 옆 사람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우린 모두 하나다. 이 연대감에 대해 늘 상상해 보고 그 느낌을 느껴보려 해야 한다. 상호 간의 불신과 폭력, 판단과 분석에서 벗어나 진정한 사랑과 연민을 회복하기 위해서는 나와 네가 다르지 않고, 하나의 근본에서 비롯된 존재임을 자각하는 게 중요하다. 그럴 때 비로소 우리는 마음속 분별심에서 자유로워진 존재가 될 수 있으리라.




23.08.04 (금)


(..)

연일 폭염경보가 발효되어서일까. 모닝페이지를 화수목 3일을 연달아 빼먹었다. 더는 안 되겠다 싶어서 오늘은 마음을 다잡았다. 단순히 더워서라기보다는 더위를 핑계 삼아 내 안의 욕망과 타협을 한 게 아니었을까. 비슷한 조건인데도 마음 하나 달리 먹었을 뿐인데 사람은 변한다. 궁즉통, 통즉변 이라 하지 않았던가. 나는 지금 이 말을 마음만 먹으면 다 된다고 말하기 위해 인용하는 게 아니다. 그보다는 적절한 환경이 세팅이 되면 변화는 절로 일어날 수밖에 없다는 말을 하려는 것이다.

(..)

인간의 자유의지나 주체성은 내가 스스로 모든 것을 선택하고 통제하고 있다는 느낌을 불러일으키는 착각일 뿐, 실은 허상에 가까운 개념일지도 모른다. 우리는 알게 모르게 외부 환경에 노출되어 있기에 100% 스스로가 만들어 낸 기준이라는 말은 성립될 수 없는 것이다. 인간에 대해 이야기할 때  환경을 떼어놓고서 이야기하는 건 무의미할 정도로 환경의 영향을 다분히 받는 존재다. 

(..)

시간은 흐르지 않는다. 다만 서서히 그 모습을 드러낼 뿐이다. 드러낸다는 말이 함의하는 건 미정의 미래가 현재로 다가오는 게 아니라 이미 정해진 것이 점차 형상을 갖춰나가는 것이 미래라는 것이다. 나는 이 말을 듣고 소름이 돋았다. 

결국 과거도 미래도 오직 우리가 부여한 선형적인 개념들일 뿐, 실제로는 모두 현재라는 무대 위에서 펼쳐지는 드라마의 소스 코드에 불과하다. 어떠한 가능성, 개념의 형태로만 존재하던 것이 '육체'라는 경험 인식 도구를 장착한 우리의 무대 위에 펼쳐질 따름이며, 그것이 우리가 현재라고 부르는 것의 정체라는 것이다.

이러한 개념 앞에 겸허함이 절로 든다. 그리고 삶이라는 영화에 지나치게 몰두한 나머지 앞으로 기울어있던 내 몸을 다시금 등받이에 편히 기대어 펼쳐지고 있는 현재라는 스크린 위의 화면을 조금은 더 편한 마음으로 감상하겠노라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선현들이 지나치게 애쓰지 말며, 그저 매 순간에 충실하라고 반복적으로 이야기했나 보다.



23.08.06 (일)


(..)

무얼 하는 데 있어 시간이 있고 없고는 사실 보다 의지의 문제라고 생각한다. 어떤 행위를 하기 위한 시간은 당사자가 그것에 대해 얼마나 자각하고 인지하고 있는지의 정도에 따라 확보되는 양이 달라진다. 즉, 그것에 대한 관심과 애정이 곧 거기에 투입되는 시간의 양이 되는 것이다.

(..)

지극히 사소해 보이는 일이라고 해도 그것이 실제로 이루어지는 실체를 얻기까지는 우리가 인지하기 힘든 부분에서부터 온갖 요인들이 작용을 한다. 그걸 상상해 보면 실로 경이롭지 아니할 수가 없다.

(..)

보고 듣고 배우고 익힌 모든 것은 알게 모르게 우리 안에 차곡차곡 쌓여가고 있다. 배움이 다른 목적을 위한 수단이나 도구가 아니라면, 배움 자체가 목적이라면, 우리는 초조해하고 조급해 할 필요가 없다. 매 순간이 성장이요, 깨달음의 진일보이니 매 순간이 목적의 달성이 아니겠는가.

초조함과 조급함은 생각이 그 행위가 아니라 그걸로 얻어낼 다른 것에 맺혀 있을 때, 그 행위가 아니라 그로부터 얻어낼 것에만 가 있을 때, 무엇인가를 도구나 수단으로밖에 여기지 않을 때 생긴다. 그러면 그 순간에 온전히 머무는 의식의 빛을 그 대상에 비출 수가 없게 된다. 

목적을 미래의 일이라고만 여기지 말자. 결국 모든 것이 펼쳐질 무대는 '지금'이라는 대지 위다. 이곳에서의 매일을 소홀히 하며 조바심에만 사는 사람은 어떠한 미래를 그려도 다 그저 '가능성'으로만 존재할 뿐, 무대 위로 올려지지 않을 것이다.

현재에 충실하며 매 걸음에 진중함의 무게를 싣도록 하자. 그러면 모든 것은 절로, 우리가 기대했던 방식이 아닐지라도, 결국엔 이루어질 것이다. 자신이 그렇게 하기로 선택하기만 했다면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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