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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간단남 Apr 22. 2024

甲辰年 戊辰月 세 번째 기록

[주간단남] 4월 3주 차

[주간단남] 시리즈에서는 제가 매일 아침 글명상을 했던 내용을 찬찬히 살펴보고 나누고 싶은 내용을 공유합니다.

발췌한 문장들은 제가 적었던 문장을 수정하지 않고 그대로 가져오는 것입니다. (맞춤법 오류, 비문 등 많을 수 있음)

굵은 글씨로 표시한 문장은 제가 새롭게 깨달았거나 꽂혀 있는 '생각'을, 밑줄 친 문장은 '행동'이 필요하다고 느낀 부분을 표기했습니다.



무의식은 언어적 표현을 통해 의식적인 것이 될 수 있습니다.

페터 비에리, <자기결정> 中






24.04.15 (월) 


(..)

상위 차원 존재와의 접촉, 레이키 힐러도 내 삶의 영역에 들어온 듯하다. 금전적, 시간적 여유를 확보한다면 그쪽으로도 발을 들여보고 싶다는 생각이 든다.


사람들의 몸과 마음을 치유하고 싶다는 열망은 어디서 비롯되는 걸까. 그것은 다름 아닌 나 자신인지도 모른다. 나 스스로의 몸과 마음의 치유와 성장에 대한 욕구가 타인에게도 투사되고 있는 것이다. 타인에 대한 욕망은 다름 아닌 우리 자신이 무엇을 필요로 하는지를 넌지시 일러준다. 세상은 나의 내면이라는 그릇에 담긴 내용물이요, 내 내면을 비춰주는 거울인 셈이다.


오늘도 그 거울을 바라볼 또 하루가 새롭게 주어짐에 감사합니다.




24.04.18 (목)


(..)

그냥 거슬리는 점 하나를 내가 확대 해석하는 것은 아닌가. 모든 것은 그저 해석일 뿐이다. 내가 지난주 모닝페이지에도 썼듯이. 그렇게 생각하자, 감정이 제 혼자만의 춤사위를 점입가경으로 더 높여가기 전에 마치 MR이 꺼지듯 차분함이 찾아왔다.  그 감정이 아예 사라진 것은 아니지만 더 진행되어 내 이성을 마비시켜버리진 않았다.


(..)

판단과 해석은 물론 그 나름의 필요와 효용이 있지만, 그것은 본질을 보는 것을 막는다. 때로는 즉각적인 판단의 개입을 최대한 뒤로 한 채 일어난 일을 그저 바라볼 필요가 있다. 해석은 현실과 다를 확률이 매우 높다.


(..)

사람은 본래 이기적인 것이 기본 모드다. 중요한 것은 내 결점은 보지 못하고 상대의 것만 보게 만드는 평가와 분석과 판단을 하지 않는 것이다. 그것도 즉각적이고 자동적인 반응. 그것은 이성을 마비시킨다. 언제나 판단은 최대한 뒤로 미루어라. 그게 귀신에 쓰이지 않는 길일 터이니.




24.04.19 (금)


(..)

꿈속의 그 장면 속에서 나는 내 안의 불안감과 막막함과 스스로에 대해 떳떳하지 못한 것을 시인한 셈이다. 윤동주 시인이 적고자 했던, 부끄러움이라는 감정을 닮은 그 무엇. 사회에서 온전한 1인분을 하고 있지 못한다는 생각에서 완전히 자유롭지는 못하다는 생각이 이따금씩 잔잔하고 부드럽게도 괴로움의 감각으로 나를 찌른다.


이건 단지 내가 생활이 될 만큼의 돈을 안정적으로 벌고 있지 못하다는, 모든 것을 '그래서 돈 얼마 버는데?'로 귀결시키는 현대 자본주의 사회의 가스라이팅에 세뇌되었기 때문만은 아니다. 그것도 없다고는 결코 말할 수 없지만, 그보다 중요한 것은 충만감의 결여다.


매일을 성실히, 매 순간에, 내가 하고자 하는 일에 필요한 모든 순간에 온전히 몰입하지 못하고 집중력이 흐트러지는 순간들이 하나둘씩 쌓여가면서 생겨난 결과물인 것에 더 가깝다. 나의 집중력의 잠재력을 너무 방치해두었다. 자유와 방종을 구분하지 않고서 요 근래를, 어찌 보면 청춘을 닮은 계절인 봄을 허투루 흘려보내고 있는 것은 아닐까.


(..)

치열함은 쥐어 짜내는 것이 아니다. 어떤 일에 치열해지기 위해 필요한 것은 악바리 근성이 아니라 지속적인 관심과 호기심이 지피는 열정의 불꽃이다. 그게 자연스럽게 일어나지 않는 분야는 애초에 몰입의 대상이 될 수가 없다. 그런 구분이 싫다면 그저 모든 순간에 현존하는 연습을 할 수밖에. 역시 이것도 애쓰지 않고 자연스레 현재에 머무는 것이어야 할 테다. 




24.04.20 (토)


(..)

포인트는 새로운 활동에 있는 게 아니라 몰입에 있다. 무엇을 하든 거기에 온전히 몰입하며 살 때 인간은 살아있음을 느낀다. 아니, 그건 비단 인간만 그러는 게 아니라 모든 생명, 비생명 존재들에 해당된다고 말할 수 있으리라. 존재의 기본 상태는 오직 매 순간 존재하는 그 자체에 머무는 것에만 있기 때문이다. 지나치게 머리가 커버린 우리 인간만이 현재에 오롯이 집중하지를 못한다. 대신 존재의 본질 밖에 있는 외부의 것들에 주의력을 빼앗길 따름이다. 


머나먼 옛날에는 존재와 한 몸을 이뤄 생존이라는 존재의 본 목적에 일심동체로 집중했을 것이다. 그러나 문명사회를 일군 뒤부터 생존은 당연시 여기는 것으로 전락하였고, 내면의 목소리와 존재 사이에는 간극이 발생했다. 그때부터가 인간이 에고와 참나라는 이원적 구조로, 실존적 차원에서의 이중 혹은 다중인격자로 변모한 시점일 테다.


이원성을 일원성으로 통합하는 것, 적어도 그것이 원래 상태였음을 아는 것이 깨달음으로 가는 첫걸음이 아닐까. 우리 모두의 근본적 뿌리가 같은 것임을 상상해 볼 줄 아는 그런 열린 마음도 필요할 테고. 그것을 자각하며, 혹은 상상이라도 하며 걸어나가는 길은 분명 그러지 않던 전과 다를 것이다. 자신은 세상에 뚝 떨어진 개별적 존재요, 그밖에 존재하는 사물과 생명, 타인들은 모두 배경과 객체에 불과할 거란 자기중심적 사고로 걸어나가던 길과는 180도 다를 것이다. 


나의 사명은 그런 깨달음을 온몸으로 체득하고 사람들을 감화시키는 것에 있다. 설교가 아닌 모범으로써. 언어나 문자가 아닌 도(道) 자체로써 말이다.




24.04.21 (일)


(..)

세상에는 남 흉을 보는 자와 그러지 않는 자로 나뉜다. 복잡한 인간을 이렇게 칼로 나누듯 100%대 0%로 나눈다는 뜻은 물론 아니며 전반적인 경향성에 관한 얘기다. 남 흉을 보는 데에 더 특화된 사람을 성향으로 따지자면 너그러움보다는 인색하며, 긍정적이기보다 부정적이며, 개방적이기 보다 폐쇄적이며, 공동체적 지향성을 지녔기 보다 개인주의적 지향성을 지닌다. 계속된 나열은 무한대로 가능하다. 이러한 이원성은 결국 음양의 조화에서 비롯된 것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한 가지 알아야 하는 것은 남을 칭찬하든 흉을 보든 그것은 결국 내 안을 훤히 비추는 행위라는 것이다. 가령, 누군가 어떤 이를 이기적이라고 비난했다고 해보자. 근데 그 이유가 자신에게 친절하지 않아 서란다. 그 순간 자신 또한 그가 나에게 잘해줘야 한다는 게 당연하다 생각하는 이기적인 사람일 뿐임이 드러난다.


우리가, 그리고 타인들, 나아가 만물이 존재하는 이유 중 하나는 우리 내면을 거울처럼 비춰주기 위함이다. 오감이 존재하는 이유도 내면에서 자아낸 거울의 상을 경험하기 위함이다. 


똑같이 A라는 사람이 있어도 민수와 철수는 A의 서로 다른 면모를 비추어 말한다. 외모부터 특성까지 모두 그 내용은 상이하다. 자신의 경험이 쌓여감에 따라 관념이 생겨나기도 하지만, 형성되어 굳혀진 관념이 계속 스스로를 강화하는 경험을 만들기도 하는 것이다. 그것이 올바르든 그렇지 않든 인간은 자신의 신념을 점점 굳혀나가는 쪽으로 경험을 만들어 나간다.


물론 그런 굳혀진 신념을 깨부숴주고 다른 것으로 바꿔주는 것도 우리 각자의 존재의 이유다. 타인, 그리고 그들이 만들어내는 사건, 사고 등은 자신 안의 굳은 가치체계를 무너뜨리고 새로운 것을 세우게 만들기도 한다. 그게 내면과 우리가 경험하는 세상 간의 상호작용 과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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