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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유롭고 주체적인 삶으로의 여정
왜 우리는 지금 여기서 당장 행복할 수 없는 것일까?
by
청윤 단남
Jan 23. 2022
얼마 전 설 연휴 KTX 티켓팅을 했다.
출퇴근을 하고 있지 않은지라
내려가야 하는 날, 올라와야 하는 날이 크게 정해진 바가 없던 나는
'실패하면 연휴 전에 미리 갔다가 연휴 끝나고 내려오지 뭐.' 하는
가벼운 마음으로 정시가 되자마자 사이트에 접속했다.
그 덕분인지는 몰라도 나는 원하던 시간대의 티켓을 모두 끊을 수 있었다.
자유에서 비롯된 여유를 가질 수 있다는 사실이 새삼 큰 행복처럼 느껴졌다.
감사한 마음까지 들어 입가에 미소가 가실 생각을 안 했다.
자유의 몸이 된지도 어느덧 1년이 지났다.
퇴사 후엔 매일이 행복과 짜릿함의 연속일 것만 같았다.
그러나, 자유가 주는 초반의 달콤함 이면에는
막막한 현실에 대한 불안함이 숨어있었고,
불안함에서 비롯된 두려움은 자유에서 느껴지던 평온한 행복감마저
어느새 완전히 잊게 만들고 말았다.
자유를 위해 구속과 억압의 공간에서 뛰쳐나왔던 나는
어느덧 스스로 만들어 낸 정신적 감옥에 갇혀,
이미 내가 누리고 있는 것의 소중한 가치를 잊고 살았던 것이다.
티켓팅을 통해 새삼 깨달은 자유에 대한 소중함과 감사함은
내가 놓치고 있었던 일상의 즐거움을,
가슴까지 차오르던 그 행복감을 다시 떠올릴 수 있게 해 주었다.
그 가슴속 꿈틀거림이 나를 다시 힘차게 움직이게 만들었다.
지금 내가 누리는 그것을 최대한 만끽하겠노라고.
그렇게 순간에 최선을 다해서 존재할 때
내 앞에 놓인 미래에 대한 불안이라는 안개가 걷히고
시야는 더욱 선명해질 것이라고 다시 한번 마음을 다 잡으면서 말이다.
***
감사함을 잊고 산다는 것.
무의식적으로 흘려보내는 매일매일의 나날들 속에서
우리는 쉬이 자신이 이미 누리고 있는 특권들이 갖는 소중함을 망각하곤 한다.
너무나도 뻔한 말이지만, 볼 수 있는 두 눈이 있다는 것에,
밤새 멎지 않은 심장이 나에게 또 하루를 경험할 수 있도록 허락해 줬다는 것에,
감사함을 얼마나 아낌없이 표현할 수 있을지는 그것을 잃어보지 않고서는 평생 알 수 없을 것이다.
하지만 불행히도 우리는 자신이 가진 것보다는
가지지 못한 것에만 집중하며 하루를 보낸다.
소위 '월 천만 원'을 벌지 못하는 자신의 처지를 한탄하거나 혹은 채찍질하느라고
아픈 곳 없이 건강한 자신의 신체가 갖는 소중함은 당연하게 여기거나 잊고 산다.
그런 결핍된 마음은 사람을 나아가게 하기보다는 좀먹을 뿐이다.
열등감과 같은 결핍은 우리를 움직이게 만드는 힘이 될 수 있을지언정
결코 행복하게 만들어 주진 못한다.
열등감을 가리기 위해 부단히 노력한 결과로 얻어낸 우월감은
열등감의 또 다른 얼굴일 뿐. 우리를 끝내 결핍의 장막을 벗어나지 못하게 만든다.
이러거나 저러거나 결국 모두가 행복하기 위해 발버둥 치는 것이라면,
왜 우리는 지금 여기서 당장 행복할 수 없는 것일까?
그것은 소멸에 대한 본능적인 두려움 때문일 것이다.
설령 지금 내가 가진 것에, 작은 것 하나에도 감사함을 느끼는 사람이라고 해도
과연 지금 자신이 누리고 있는 것들이 언제까지고 그 자리에 있을까 하는 두려움에서 자유롭기 어렵다.
'모든 것은 결국 변한다던데, 지금 이 행복도 그런 것 아닐까?' 하는 작은 깨달음.
그러나 자유로운 해방감을 느끼게 해주지 못한다면 그것은 진정한 깨달음이라 볼 수 없다. 니체가 했던 말처럼, 깨달음은 웃음을 동반한다. 그것은 허탈함과 허무함을 동반하며, 동시에 즐겁고 또한 자유로움을 느끼는 데서 비롯된 웃음이다.
따라서 모든 것은 언젠가 소멸한다는 만고불변의 진리는
개인에게 두려움이 아니라 자유로움을 선사할 때,
진정한 깨달음으로 작용한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지금 내가 누리는 것들이 언제든 사라질 수 있다는 것을 진정으로 알 때,
그 시기가 언제 닥칠지 노심초사하는 대신, 내가 가진 것들을 온 마음으로 누릴 수 있게 된다.
백화점 초콜릿 코너에 진열된 최고급 초콜릿 중 하나를 집어서 먹더라도
우주에 단 한 개 남은 마지막 싸구려 초콜릿을 먹을 때에 느낄 달콤함에 비할 수는 없을 것이다. 매일을 마치 인생의 마지막 날인 듯 사는 사람은 과연 절망 속에 살까, 가슴 벅찬 즐거움과 감사함 속에 살까?
나는 우리가 적어도 매일을 절망보다는 희망과 감사, 즐거움 속에서 살아가길 빈다.
동시에 절망 역시 희망이라는 감정을 더욱 잘 느낄 수 있기 위해 필수 불가결한 것을 알기를 바란다.
삶을 자신의 입맛에 맞게 하나부터 열까지 다 통제하는 것은
필연적으로 실패할 수밖에 없다.
어찌할 수도 없는 것이라면 그렇게 머리를 쥐어 싸매고 고통스러워해야만 할까?
***
Photo by Phil Hearing on Unsplash
삶이라는 거대한 파도 앞에서 인간의 원대한 계획이란
쉬이 무너지고 말 모래성과도 같다.
아이들은 모래성을 지을 때는
그것이 파도에 무너질까 조마조마해하는 것마저도 까르르 웃으며 즐긴다.
그것이 혹 파도에 흔적도 없이 떠밀려 사라져도
무엇이 그리도 신나는지 또다시 모래성을 짓는다.
전과 같이, 혹은 더 멋지고 튼튼하게.
아이들은 모래성을 짓는 행위 자체를 순수하게 즐긴다.
우리가 삶에서 세우는 원대한 청사진을 그리는 과정도
마치 아이들이 모래성을 쌓듯 즐거움을 유발해야 한다.
그것을 이루는 과정에서 발생하는 모든 부정적 감정들은
더 넓은 관점에서 보면 '놀이'라는 과정의 일부로 바라보아야 한다.
동시에 그것에 지나친 의미를 부여해서도 안된다.
모래성이 무너졌다고
낙담하고, 세상 모든 것을 잃은 듯 망연자실하는 아이를 본 적이 있는가?
설령 그 순간 속상함에 눈물을 흘리더라도
부모가 건네는 달콤한 간식 앞에서 어느덧 모래성은
파도와 함께 그들 기억 저편으로 사라지고 없다.
그런 것이 삶이 아니면 무엇이란 말인가.
순간에서 다음 순간으로, 또 그 순간에서 다음 순간으로.
우리 모두는 헤엄치는 법을 배워야 한다.
삶이라는 흐름을 예측을 불허하는 넓은 바다에서 자유롭게 노닐기 위해서는 말이다.
결국 우리가 배워야 할 것은 바다와 하나가 되는 것이다.
때로는 물살을 가르고, 때로는 물살에 몸을 맡기며
예측할 수 없는 그 큰 흐름과 조화를 이루며 살아가는 것.
이러면 어쩌지, 저러면 어쩌지 하며
자신에게 일어나서는 안 되는 일들의 목록만을 하루하루 쌓으며 살아가는 것은
바다에 대한 미지의 두려움만 증폭시킨다.
바다를 사랑하자.
바다 깊은 곳의 어둡고 음습한 구석까지도 사랑하자.
삶과 하나가 되어보자.
삶이 선사하는 모든 순간을 '전체'를 경험하게 해 줄 '부분'이라고 생각하자.
그것이 삶의 비밀은 결국 조화에 있다는 것을 머리가 아니라 가슴으로 깨닫게 해 줄 것이다.
가슴을 열고 삶이 나를 어디로 데려갈지,
그 흐름에 몸을 맡기고 이따금씩 그 흐름에 발맞추어
나만의 궤적을 만들어 나가 보리라.
이것이 삶이 우리에게 요구하는 단 한 가지이며,
단 한 번뿐인 이 생을 후회 없이 경험할 수 있는 지혜이지 않을까.
Photo by Feri & Tasos on Unsplash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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