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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간단남 May 31. 2022

넌 뭐 다른 것 같아?

꿈꾸는 자들의 날개를 꺾는 말에 대하여

새소리가 맑다. 지저귀는 저 새소리의 음색이 오늘따라 아름답게 들린다. 평소에는 까치  소리였는데 오늘은 다른 새인 것 같다. 일정한 간격과 리듬으로 새들은 지저귄다. 저마다의 소리로. 그들도 경쟁이란 걸 하겠지? 새들이 지저귀는 이유가 예를 들어 구애라면 경쟁이 당연히 수반될 것이다. 암컷이 하든 수컷이 하든 구애를 통해 선택받고자 하는 의도는 우리 인간의 눈으로 보면 경쟁구도다. 1:多의 관계를 형성하기 때문이다.


궁금한 것은 그러한 경쟁에 참여하는 당사자들의 마음이다. 우리는 경쟁에 임할 때 상대와 나를 끊임없이 비교하고, 우월감 혹은 열등감을 느낀다. 그들도 그러할까? 잘 모르겠다. 적어도 내 눈에는 그들은 그들이 낼 수 있는 최선의 소리를 낸다. 어디서 보고 베끼는 것도 아니고 그냥 그들 안에 내재된 각자만의 소리. 각자만의 리듬과 음색으로 상대를 유혹하기 위한 소나타를 연주한다. 거기에 나는 경쟁의식이나 열등감 혹은 우월감은 느끼지 못한다. 한 연주자의 혼을 담은 연주만이 들릴 뿐이다. 


그들은 아마 낙심 같은 것을 하지 않을 것이다. 혼을 담은 연주에도 불구하고 자신을 선택하지 않은 상대를 저주하거나 비난하지도 않을 것이다. 자신이 부족한 탓이기 때문일 것이라고 자책하지도 않을 것이다. 그리고 마음의 문을 닫아 '암컷' 혹은 '수컷'이라는 집단 전체에 대해 선입견과 악감정을 품지도 않을 것이다. 그들은 그저  잠시 몸을 추스른 뒤 곧바로 쿨하게 자리를 뜨고 또 언젠가 다른 상대를 만난다면 늘 그랬던 것처럼 또다시 최선의 연주를 할 것이다. 그들은 그렇게 자신에게 주어지는 매 순간에 최선을 다하며 살뿐이다. 그게 다다. 그게 삶의 전부일 수도 있다.


어떻게 보면 참 단순하지만, 동물들에 비해서 복잡한 사고능력을 지닌 우리에게는 그렇게 단순하게 사는 것이 생물학적으로 불가능한 것일지도 모른다. 복잡하게 떠드는 마음이 있으니까, 거기에다 동물로서의 생물학적 본능까지 있으니까. 어쩔 수 없다며 자기 몸과 마음 하나도 제 뜻대로 이끌 수 없는 스스로에 대한 변명을 으레 늘어놓게 되는 것이다.





나치의 수용소에서 살아남은 빅터 프랭클 교수는 말했다. 우리 인간은 어떤 관점으로 스스로를 바라보고 삶의 지향점을 어떤 위치에 두느냐에 따라 달라진다고. 마치 비행기 착륙 시 바람을 고려하여 원하는 지점보다 더 높은 곳을 목표로 해야 비로소 의도한 그곳에 착륙할 수 있다는 '크래빙(Crabing, 측풍착륙)' 기법처럼 말이다.


인생이라는 활주로에도 언제나 바람과 같은 외부적 환경에 존재한다. 그 속에서 내가 어디에 착륙을 할 것인지는 비행기 핸들을 잡은 내가 결정한다. 삶에서 자신이 어떤 환경에 처했든지,  나 자신을 어떻게 보느냐는 순전히 나만이 정할 수 있다.  타인에게는 그러할 권리가 없다. 그럼에도 우리는 너무나도 쉽게 남들의 참견에 간섭받고 또 우리 역시 남들의 삶에 간섭한다. 사람은 열등감을 가리려고 남에게 간섭하고, 우월감을 느끼려고 남에게 간섭한다.


누군가 자신은 높고 고고한 존재가 되겠노라고 하늘을 쳐다보고 걷는 사람이 있다면, 그저 앞만 보고 걷는 '평범한 인간'인 사람들은 그 사람이 곁에 있으면 열등감과 위축감을 느낀다. 자신의 평범한 삶이 잘못되기라도 한 것처럼 위협을 받는다. 그래서 무의식적이든 의식적이든 그 사람을 끌어내리려고 노력한다.  '야, 사람이니까 그럴 수 있는 거야.', '인간도 결국 다 같은 동물일 뿐이야.', '너 혼자 고고한 척이냐. 넌 뭐 다를 것 같아?' , '네 말만 맨날 맞지?' 등등.


자신에게 오물이 묻어 있는 것이 정상인 줄로만 알았는데 오물을 묻히고 다니지 않은 사람을 발견하자 부아가 치민다. 나 자신의 존재가 부정당한 것 같아  끝내 그 사람에게도 오물을 열심히 튀긴다. 끝내 그 사람에게도 오물이 옮겨 붙는다. 사람은 사람이니까. 그가 신은 아니니까. 그렇게 오물이 조금이라도 그에게 묻고 나서야 안심한다. '거봐, 지가 뭐 대단하면 얼마나 대단하다고.', '너도 우리랑 같은 사람이야 짜샤. 다른 척하지 마'.

나 자신을 방어하고자 무심코 내뱉었던 그런 말들이 그렇게 높이 날아오르려던 한 사람의 인생을 때론 좌절시키고 만다는 것을 그들은 결코 알지 못한다. 알아도 중요한가? 자신의 삶이 더 중요하지.


사실 앞만 보며 오직 동물적 본능에만 충실하게 살때 조차도 사실 간섭은 일어난다. 하지만 이때의 간섭은 개인의 방어기제에 의한 것이 아니라, 사회적 제도에 따른 간섭이다. 각종 사회적 규제와 법으로 이뤄진 시스템은 각 개인의 지나친 본능의 추구를 억제한다. 그것이 사회의 혼란을 막아주기 때문이다.






세상에는 두 종류의 인간이 존재하게 된다. 본능에 몸을 맡겨 앞만 보고 걷는 사람. 그리고 저 멀리 자신만의 유토피아를 향해 걷는 사람.


높은 곳을 바라보며 살고자 했을 때 주변에는 반드시 나를 끌어내리려는 시도가 생길 수밖에 없다. 그것이 누구든 우리를 비난하고 끌어 내리고자 할 자유는 있다. 그러나 거기에 굴복할 지의 여부는 우리가 결정한다. 최종적으로 우리 자신에 대해서 어떻게 생각하느냐를 결정 하는 주체는 바로 우리 자신인 것이다.



방해 공작마저도 그저 삶이 일어나는 여러 작은 해프닝 중 하나로 여기는 열린 마음으로 받아들여야 한다. 그것과 싸울 필요는 없다. 풀잎이 태풍에도 버티는 이유는 그것에 그저 흔들리도록 자신을 태풍에 내맡겨 버리기 때문이다. 아무리 뿌리가 강해도 그것과 맞서 싸운다면 태풍에 뿌리가 뽑혀버리는 나무 꼴을 면치 못하리라.


그러니 흔들리자. 끊임없이 나부끼자. 풀잎처럼, 깃발처럼. 그러나 내 안의 뿌리, 내 안의 깃대를 잃어버리지 말자. 내 삶에 나아가고자 하는 방향을. 내면의 북극성을 잃어버리지 말자.


길을 잃지 않는다면, 멈추지만 않는다면 좋다. 그럼 된 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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