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그들은 그렇게 끝난 것이 아니라 새로운 시작을 잉태한 것입니다.
겨울이 깊습니다.
깊은 겨울도 을씨년스러운데 미세먼지와 습격과 사회 곳곳에서 들려오는 소식들은 반가운 소식들보다는 아픈 소식들이 더 많이 들려옵니다.
이런 겨울에도 여전히 안녕하시라고 할 수밖에 없습니다.
왜냐하면, '안녕'이라는 인사는 절망의 순간에 더 필요한 응원이기 때문입니다.
겨울이 깊은 날,
동장군의 고향이라 할 수 있는 강원도 한판에서 겨울 속에 들어있는 봄을 찾았습니다.
마치 꽃처럼, 추운 겨울을 나기 위한 솜이불처럼, 봄바람이 불면 곧바로 여행길에 올라 대지와 입맞춤하는 순간부터 싹을 틔우겠다는 결의를 품고 씨앗은 솜털 사이에서 꿋꿋하게 버티며 살아가고 있습니다.
'버틴다.'는 말의 소중함, 그래요. 삶은 버티는 것이지요.
빛나지 않으면 어떻고 남이 알아주지 않으면 어떻습니까? 지금 중요한 것은 여전히 '버티며 살아간다는 것'이겠지요. 그 이상을 요구하지 마세요. 그냥 버티는 중이니까요.
갈대나 억새나 별 다를 바 없다고 생각하신다면 잘못 생각하시는 겁니다.
아주 많이 다르죠.
사람들도 그렇습니다.
당신과 같지 않아요. 아주 결이 다르죠.
우리가 실수하는 것은 나와 다르지 않을 것이라는 착각을 넘어서 자신과 같기를 바라는 것이지요.
저마다 풀꽃 들꽃들이 달라서 들판이 아름다운 것처럼, 우리네 사람 사는 세상도 그런 것 아닐까요?
다름을 받아들이는 것, 쉽지 않은 일이지만, 그래야 너도 나도 숨통이 트이는 법입니다.
강원도 산골 어느 밭에서 만난 부추 씨앗입니다.
꽃을 닮았죠?
추위에 맨 몸으로 겨울을 난 저 까만 씨앗은 흙을 만나 또 하나의 생명이 될 것입니다.
아직 보이지 않지만 엄연한 사실이고, 그 엄연한 사실을 보지 않고도 믿는 것, 그것이 희망이겠지요.
사실, 우리의 미래도 보이지 않습니다.
그래서 '불확실성의 미래'라고들 하는데, 보이지 않는다고 불안한 감정만 키운다면 우리의 삶은 안절부절 힘겨워서 살아갈 수 없을 거예요. 보이지 않음에도 보이는 것처럼 믿을 수 있을 때, 담대하게 살아갈 수 있습니다.
자연으로 눈을 향하면 어렵지 않게 볼 수 있는 모습들입니다.
한 겨울 추위에도 여전히 푸름을 간직하고 있거나, 척박한 바위틈에 뿌리를 내리고 자라는 나무 같은 것이죠.
삶은 종종 예측할 수 상황을 만나게 됩니다. 아니, 대부분 그렇죠.
그런데 그게 절망이 아닌 이유는, 그 어떤 상황이라도 넉넉하게 이겨낼 수 있는 힘이 우리에게 있다는 것이죠.
그리고 왜 반드시 이겨야만 하지요? 간혹은 져도 좋고, 넘어져도 되지 않나요?
왜 우린 성공만 해야 하나요? 실패하면 안 되나요?
실패해 보지 않고, 눈물 젖은 빵을 먹어보지 않은 사람이 삶이 뭐인지 알 수나 있을까요?
그래서 사실 실패는 없는 거죠. 단지 어려울 뿐이에요.
이르긴 하지만, 올해 첫 꽃을 만났습니다.
완전 바보꽃이죠. 그런데 말이죠. 나는 이 꽃을 보면서 봄을 봅니다.
바보꽃이 봄의 전령사인 셈이네요.
어쩌면 세상은 이런 바보꽃 같은 사람, 약사 빠르지 못한 바보 같은 사람들 때문에 살만한 것입니다.
약사 빠른 사람들은 워낙 자기를 위해서 발 빠르기 때문에 인정머리도 없죠. 그러니 부러워할 필요가 없어요.
버들강아지는 2019년 산입니다.
바보꽃은 아니죠. 그냥 한 겨울에도 제 안에 있는 뜨거운 마음을 참지 못해 꽃을 피우곤 하지요.
물론, 저게 꽃은 아니고, 저 안에 꽃술을 가득 품고 있습니다. 그래도 봄을 보는 것과 진배가 없어요.
다 끝난 줄 알았고, 실패한 줄 알았어요.
그러나 그게 끝이 아니었어요. 봄을 잉태하고 있었던 것이지요.
그러니까, 힘내세요.
이 말도 힘들면 그냥 잠시 다 내려놓고 힘 빼세요.
그래도 우리의 삶, 아무 문제없을 거예요. 그렇게 살아갈 수 있는 게 우리네 삶이니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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