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나무 꽃들 피어나는 봄의 들판에서
완연한 봄이다.
나무 꽃 피어났으니 무심한 사람이라도 봄 온 줄 알 수 있는 봄이다.
'코로나 19'로 봄이 오는지 마는지, 일상의 흐트러짐은 쉽사리 추스를 수 없었다.
이전과 같은 일상을 회복하려면 꽤나 많은 시간을 필요로 할 터인데, 아직도 '코로나 19'는 우리 곁은 서성거리고 있으니 '어둠의 긴 터널' 속에 갇힌 듯하다.
그래도 봄은 우리 곁에 왔다.
'무위자연(無爲自然)'.
그렇다.
누구를 위하지 않아 자연이다.
누구를 위해서 봄이 오는 것이 아니라, 누구를 위해서 꽃이 피는 것이 아니라, 그냥 때가 되었으니 봄 오고 꽃 피는 것이다.
그냥 그렇게 자신의 삶을 살았을 뿐인데, 자기도 알지 못하는 사이에 타자를 위한다.
왼 손이 하는 일을 오른손이 모르게 하는 기적의 일상, 그것이 무위자연이다.
저마다의 취향에 따라 다르겠지만, 나는 딱 이맘때가 가장 예쁘다.
아직 피지 않았기에 피어날 것에 대한 기대와 겨울을 딛고 피어나고 있는 대견스러움이 더해진 까닭이다.
화들짝 피었을 때도 물론 예쁘지만, 그 순간은 너무 짧다.
그 짧은 순간을 오랫동안 간직하는 나만의 방편은, 꽃몽우리부터 좋아하기다.
그러나 꽃은 그 마음을 아는지 모르는지, 피어나면 곧바로 자신의 임무를 다하고, 열매를 위해 연연하지 않고 떠난다. 꽃의 최종 목적은 '열매'요, 그 안에 있는 '씨앗'일 터이다. 오로지 모든 것은 '목적'을 위해 집중되어 있다.
지금 예쁜지, 안 예쁜지 무심(無心)하다.
전염병이 기승을 부리든지 말든지 꽃은 피어난다.
그래서 고맙다.
만일, '코로나 19'에 봄꽃들의 행렬이 주춤했다면, 인간은 얼마나 큰 고통을 감내해야 했을까 싶다.
'세상사 어찌 돌아가든 말든 나는 피어 난다.'
이것이 꽃의 마음일 터이다.
흔하디 흔한 꽃이라고 대충 피지 않는다.
꽃을 많이 피운다고 꽃 한 송이라도 대충 피워내지 않는다.
한 송이 한 송이에 최선을 다한다.
문득 그들은 인간들이 자신들을 불러주는 이름이 '개나리'라는 것을 알까 싶다.
그 이름의 뜻은?
식물 이름에 '개'자(字)가 붙으면, 비슷하지만 좀 떨어지는 것 혹은 '작은 것'인 경우가 많다.
나리꽃과 비슷하지만, 작은 꽃이라서 붙여진 이름일 터이다.
작은 꽃몽우리 하나에서 도대체 몇 개의 꽃이 피어난 것일까?
그리고 꽃잎과 꽃술은 또 몇 개일까?
올해는 말고, 내년에는 한 번 세어봐야겠다.
왜, 올해는 아니냐고?
'코로나 19'로 어수선한 시국에 꽃송이 세고 있는 것이 신선놀음하는 것 같아서 미안해서 그렇다.
세상사 어찌 되었든 그저 묵묵히 자기의 길을 가는 자연이 있으니 얼마나 위로가 되는가?
그렇게 자연을 닮은 사람이 있어 또 위로가 되는 것이려니...
* 이 글에 사용된 이미지의 저작권자는 필자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