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시건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해석이 중요하다
사실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해석이 중요하다.
이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것들은 어떻게 해석되어지는가에 따라 존재가치가 달라진다.
물론, 그 존재 자체가 변하는 것이 아니라 그 존재를 해석하는 이에게 달라지는 것이지만, 해석에 따라 존재의 의미가 달라진 게 되는 것, 그것이 존재의 숙명이다.
이맘때, 남한산성에 올랐다.
숲은 짙푸른 녹음으로 어두웠고, 숲 속엔 어렵사리 빛들이 스며들고 있었다.
뜨거운 여름날이면 흔하디 흔한 빛이 숲 속엔 드문드문 스며들어 빛이 비치는 곳에 머무는 것들을 아주 특별하게 만들고 있었다.
사진은 빛이 그리는 그림이다.
빛을 조절할 줄 알아야 자기의 마음이 담긴 사진을 담는다.
숲 속에서 한 줄기 혹은 두 줄기 빛에 비추는 것들을 바라보면서 '사소한 것은 하나도 없다'는 말이 진리임을 깨닫는다.
사소하고, 흔하디 흔한 것들이 어느 순간 특별한 것으로 다가오고, 특별한 것들도 사실은 아주 사소한 것임을 알게 되는 순간이 있다. 그래서, '사소한 것은 하나도 없다'는 말은 틀림이 없다.
임계점,
삶의 임계점에 서신 어머니의 손을 잡고 나도 언젠가는 삶의 임계점에 설 것이며, 어머니처럼 담담하게 죽음을 맞이할 수 있길 바랐다. 삶의 임계점 이후, 그것이 어떤 것인지는 내게 중요하지 않다.
지금, 여기서 나는 어떤 삶을 살아가고 있는지가 중요하다.
해석이 중요하다는 것은 '관점'에 대한 이야기다.
'사소한 것은 하나도 없다'는 자각이 주는 것은 결국 내 삶을 진지함으로 이끈다.
물론, 안다.
진지하게 살아가려고 해도 여전히 진지하지 못한 삶, 그럼에도 진지하게 살고자 하므로 지금의 존재가 아닌가?
같은 곳에서 서로 다른 것을 본다.
관점의 차이, 시선의 차이가 가져오는 결과다.
그렇다면, 내 앞에 펼쳐지는 것을 우리는 어떤 눈으로 바라봐야 하는지 너무도 자명하다.
볼 일 있는 것으로 보거나 별 볼 일 없는 것으로 보거나, 사소한 것으로 보거나 특별한 것으로 보거나 딱히 이분법적으로 분리되지 않는다고 할지라도 어떤 시선이 자신을 깊게 만들어갈 수 있는지는 자명한 것이다.
아무것도 아닐 수 있는 풍경, 여전히 지금도 아무것도 아닐 수 있는 풍경, 어느 숲에서나 볼 수 있는 평범한 혹은 사소한 풍경이지만, 이 사진에는 나의 특별한 추억이 복선처럼 깔려있다.
7월이었고, 명퇴를 앞둔 친구와 함께 이 시대 가장의 무게에 대한 이야기를 나누며 서로 위로해주고 있었다. 그리고 저 숲길을 걸어 다시 우리가 짐 지고 살아가야 하는 무거운 일상으로 돌아왔다. 삶의 무게는 다르지 않았지만, 저 숲길을 다녀온 이후, 그 삶의 현실은 더 무거운 짐을 지웠을지라도 그냥저냥 또 살아갈 수 있었다.
누구에게는 아무것도 아닌 사소한 것들로부터 내가 위로를 받는다는 것은 문제일 수 없다. 오히려 삶을 살아가는데 꼭 필요한 특별한 힘을 가지고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내게 사소하게 느껴지는 것이라고 할지라도 누군가에게는 한없이 소중한 것일 수 있음을 알고, 그 무엇도 시답지 않은 것으로 여기지 말 것이다.
다시 일상, 말라비틀어진 덩굴식물과 어디선가 날아온 폐비닐이 바람이 흔들린다.
그리고 여름 뜨거운 햇살이 만들어낸 그림자는 바람에 살아있는 듯 시시각각 변했다. 어떤 화가가 이렇게 시시각각 움직이는 작품을 그려낼 수 있을까?
그런 점에서 이 사소한 풍경은 어떤 위대한 예술가의 작품보다 특별한 작품으로서의 가치가 있다. 내게는.
오늘을 살아가면서도 우리는 수많은 사소한 일들을 만날 것이다.
그러나 다른 눈을 뜨면, 단 하루밖에 주어지지 않은 오늘의 소중함으로 인해 가슴 벅찬 날이 될 것이다.
이제껏 없었던 날, 앞으로도 없을 날, 그런 날을 살아가면서 만나는 것들 중에서 사소한 것들이 어디에 있겠는가? 그런 날들이 축적되어 오늘의 나를 만들었고, 내일의 나를 만들 것이니, 오늘이 어찌 중하지 않겠는가?
나는 오늘을 특별한 날로 살아갈 준비가 되었는가?
그 시작이 '사소한 것은 하나도 없다'는 자각으로부터 시작된다면 너무 시시껄렁한 이야기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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