병자호란 당시 최명길과 맞섰던 척화파 김상헌
두 충신이 지닌 보국의 두갈래 길.
병자호란은 임진왜란과 더불어 우리에게도 아주 잘알려진 조선시대의 전쟁입니다. 한겨울이 미처 다 지나가기 전이라 혹한의 삭풍만으로도 힘들었을 백성들에게, 전쟁의 가혹함까지 더해져 감히 가늠하기 어려울만큼 엄혹했을 역사이기도 합니다. 몇년전에는 김훈작가의 남한산성이라는 소설을 영화화하여 좋은평가를 받기도 했죠. 저 역시 소설과 영화를 재밌게 봤습니다.
최명길에 대해서는 많은 이야기가 알려져있고, 당시 최명길의 실리중심의 외교판단에 대해서는 후세에 더 칭송받고있으니 이번에는 척화파 김상헌에 대한 이야기를 좀 해보려고합니다.
김상헌은 임진왜란중 과거시험에 합격했습니다. 그 대쪽같던 성격 때문도 있었을테고, 입직이후에 사직,체직,파직 등으로 관직생활이 평탄하지는 못했습니다. 억울하게 파직된적도 있고 분을 못참고 상소를 올렸다가 체직된적도 있고 그렇습니다.
김상헌이 본격적으로 역사에 이름이 남은것은 역시 병자호란때입니다. 최명길은 실리파의 대표로 출성하여 항복하고 후일을 도모하자라는 주장을 폈고, 김상헌은 출성하여 나라를 통째로 바친뒤에 종묘사직이 보존된 예가 없다며 거칠게 맞섰습니다. 사실 이미 많이 아는 사실이지만, 당시 청나라 사정은 그리 좋지 않았습니다.
파죽지세로 남하하여 인조를 남한산성에 가두는것까지는 좋았지만 당시 청나라에게는 시간과 자원 모두 부족한 상황이었죠. 당시 명나라가 휘청대고 있는 상황이기는 했지만 청나라는 여전히 오삼계의 산해관을 넘지못하고있었습니다.
김상헌은 정묘호란때 명나라에 직접가서 원병을 요청한적이 있었던 관리였습니다. 그래서 김상헌은 당시 청나라와 명나라의 사정을 조선내에서는 누구보다 잘 알고있는 사람이기도 했습니다. 실제로 청이 아직도 북경으로 통하는 산해관을 넘지 못하고 지지부진한 상태에서, 조선이 청나라에 항복해버리면 나중에 명나라에게 받을 보복은 누가 감당하느냐라는 것이 김상헌의 의견이었습니다.
당시 조선은 병자호란(1637년) 이전 임진왜란(1592년) 때 명나라에게 받은 지원에 대해 일종의 부채의식이 강하게 존재하였던 시기이기도하였습니다. 간혹 여러매체에서 조선이 명나라를 아비로 칭하며 쓸데없는 사대의식으로 설치다 병자호란을 야기하였다고 이야기하여, 당시 조선을 지나치게 폄하하는 경우가 있는데 아주 정확한 이야기는 아닙니다.
당장40여년전 명나라가 기둥을 뽑아가며 왜란을 도와줬는데 시기가 얼마나 흘렀다고 바로 명나라 뒤통수를 칠수가있느냐라는 나름 그럴듯한 의견이 당시 조선관료의 생각이기도 했던겁니다.
어쨌든 당시 상황에 대한 모든것을 알게된 후대들의 생각으로는 호란시절 조선관료에 대해 여러불평을 할 수 밖에 없는것이 사실입니다만, 1637년 급박했던 그 때에는 최명길이든 김상헌이든 양측의견 다 일리는 있었던 상황이었습니다.
결국 인조가 성밖으로 나오고 삼전도의 굴욕은 일어납니다. 당시 김상헌은 어디있었을까요. 영화속에서는 자살을 한것으로 나오는데, 사실 항복이 결정되고 김상헌은 자살을 시도했다 실패하고 고향인 안동으로 낙향합니다. 참고로 항복조건으로 청나라에서 척화를 주장했던 신하 셋을 보낼것을 조선에게 요구하였는데, 김상헌은 자신을 보내달라고 청하였으나 거절당했습니다.
이 때 당시 안동으로 가버린 행동으로 김상헌은 또 한번 관료대신들에게 많은 욕을 먹게되죠. 임금이 머리를 조아리는데 신하라는놈이 고향으로 내뺐냐라는 식으로 김상헌을 조롱합니다. 이 때 김상헌이 일갈한 말이 나름 뼈가 있습니다.
'신하는 군주자체가 아니라 군주의 뜻에 충성하는것이지, 군주자체를 맹목적으로 따르는것이 아니다. 무분별한 충은 내시나 아녀자들이 하는것이지, 사대부의 충성은 그런것이 아니다'
사실 김상헌은 병자호란이 터지고 인조가 남한산성에 갇힌것을 알고 수십리를 달려와 남한산성에 합류한 인물입니다. 항복할때 안동으로 내려가버린것을 두고 욕만하기에는 그 인물됨을 함부로 평하기 어렵습니다. 당시에도 김상헌을 배척하던 신하들조차 그를 대쪽같은 사람이라고 취급했던걸보면 한 얼굴로 두가지 생각을 하는 인물은 아니라는것이 그시절 평가였던것같습니다.
잠깐 딴 얘기를 하자면 김상헌은 철저한 원칙주의자였습니다. 인조반정 이후 광해군의 아내가 건강이 좋지않다는 소식에 아무리 폐비라할지라도 그 건강을 돌보아 예를 다하여야한다는 주장을 했던것이 김상헌이었습니다. 또한 이괄의 난 때 자신을 이조참의에 임명하려했던 인조에게 그 자리를 계속 거절하기도 하였는데, 당시 병조에 김상헌의 형이 벼슬을 하고있다는것(상피제)이 그 이유였습니다.
강화에서의 항복 이후 김상헌에 대한 이야기가 흥미롭습니다. 청나라가 명나라를 치기위해 조선군을 출병시킬때,김상헌은 반대상소를 올렸다가 1640년 한겨울에 심양으로 잡혀갑니다. 이때 지은 시가 그 유명한 '가노라삼각산아'입니다. 당시 이미 일흔을 넘긴 나이였습니다. 재밌는것은 당시 최명길도 같이 압송되었는데 이 과정에서 두 사람이 그간의 묵은감정을 어느정도 해소하였고 서로의 의견을 이해하게되었다는 이야기가 전해집니다.
아무튼 당시 일흔이 넘은 노구를 이끌고 잡혀온 김상헌은 청나라관리들에게도 주눅들지않고 당당하게 행동했다고하는데 그래서 청나라관리들도 저 늙은이가 예삿사람은 아니라 평했다합니다. 당시 용골대가 심양으로 끌려온 김상헌이 굳이 조선과 청나라를 나눠 두개의 나라라고 이야기하자, 용골대가 조선은 이미 항복한나라인데 그대는 왜 두개의 나라라는것이오?라는 물음을 김상헌에게 던졌습니다. 그러니 김상헌이 엄연히 국경이 존재하는데 그럼 두개 나라지 뭐란말이오라하였다하니 청에서도 김상헌을 그저 호락한 사람으로만 보지 못했습니다.
심양에서도 최명길과 김상헌은 그 특유의 기질이 그대로 드러납니다. 심양에서 풀려날 때 청황제가 죄를 없애주었으니 황제가 있는곳으로 절을 하라는 명령에 최명길은 어쨌든 풀어주었으니 절하고 빨리 이곳을 벗어나는게 상수라며 절을 하였고, 김상헌은 예가아니라며 결국 절을 하지않았다고합니다.
제가 김상헌에 대한 이야기를 이리 쓴것은 사실 효종실록에 쓰여진 김상헌에 대한 평가 때문입니다. 효종실록에는 김상헌에 대해 이렇게 적혀있습니다.
"사신들이 논합니다. 옛사람이 '문천상이 송나라 삼백년정기를 거두었다'고 하였는데, 세상사람들은 '문천상 뒤 동방에 오직 김상헌 한사람만 남았다' 하였습니다."
제가 송나라의 최후가 가진 그 비장함에 대해 쓴적이 있는데 당시 송나라 말기 충신들 중 하나가 문천상입니다. 송말삼걸 중 일인이죠. 송나라 삼백년정기를 문천상이 거두었다는 문장은 송나라가 3백여년간 사대부를 보살펴준것에대한 보답으로, 마지막 사대부였던 문천상이 보여준 절개에 대한 찬사의 한줄입니다. 당시 사람들은 김상헌을 그런 문천상과 비견할만한 인물로 보았고, 그래서 저 역시 김상헌이 지녔던 인물됨에 대해 글로 써보았습니다.
참고로 저는 김씨도, 안동김씨도 아닙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