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지훈의 '승무'
이 시를 모르는 분은 아마 없을겁니다.
교과서에 전문이 들어가있고, 시에 대한 해석은 중고등학교 과정에서 꽤나 심도있게 가르칩니다. 사실 저는 문학적 감수성이 뛰어나지 못한 학생이었다보니, 문학작품들을 읽는것은 그저 수험공부의 일환일뿐이었던 시기였었습니다.
지금에와서야 하는 고백이지만, 승무라는 시가 가지는 표현의 아름다움에 대해 약간이나마 이해할 수 있었던 시기는 스물 중반이 넘어서였네요.
사람에게 문학이란 무엇인가라는 질문은 정해져있는 정답이 없습니다. 고전 중에서도 가장 위대한 클래식 중 하나로 이름 남은 죄와벌이라는 작품이 그저 궁핍한 생활을 타계하기위해 빠르게 써낸 소설이라는점, 그 부분에 대해서만 본다면 문학은 무어라고 정의내리기가 더 어려워집니다.
지극히 개인적으로 문학이라는 분야가 대단히 감수성높은 소수의 재능을 지닌 특권층만이 누릴 수 있는 고귀한 지적영역이라는 이야기에 대해서는 딱히 동의하지 않습니다. 물론, 그런 생각때문에 저의 문학적성취나 식견, 소양의 폭이 좁을 수 있다는 점에는 동의하는 바입니다.
승무에 대한 이야기를 하려고 폰을 켰는데 쓸데없는 말이 길었습니다.
조지훈 승무에서 가장 돋보이는 부분은 결국 '나빌레라' 일것입니다. 가끔씩 저런 단어는 어떻게 만들어 내는걸까라는 생각이 드는 경우가 있는데 승무의 저부분이 저에게는 그렇네요. 아름답습니다.
우리는 하루에도 몇번씩 아주 사소한 깨달음, 해탈의 순간을 가졌다가 잠들기전에 그러한 깨달음을 잊고 내일을 맞이합니다. 비슷하게 어제의 행복은 오늘 잊혀지고 오늘의 상처와 슬픔은 내일 어딘가에서 눈녹듯 사라질 수도 있을겁니다.
문학에 대한 불명확한 감수성은 인생의 어떠한 부분을 지날때, 갑자기 내리는 소나기처럼 다가올 수 있습니다. 아련한 짝사랑에 대한 기억이나 지나간 사랑에서의 실패로 길가에 앉아있을 때, 문득 중학교시절 배웠던 소나기라는 소설이 생각날 수 있는것처럼요. 인생의 끝이라고 생각한 곳에서, 내일을 담보할 수 없는 오늘을 살고있을 때 우리는 오헨리의 마지막잎새를 생각해볼수도 있을겁니다.
학창시절에는 그저 점수를 위해 외우듯 끄적였던 교과서의 시나 소설들이 앞으로 펼쳐질 인생, 어떠한지점에서 나를 위로해줄 한 문구가 될수도 있다는것을 깨달은지가 몇 해 안되었습니다. 억지로라도 배우지 못했더라면 저는 망망대해에 놓인 돛단배에서 아무것도 헤집을 거리를 찾지못하는것과 마찬가지인 상태가 되었을지도 모를일입니다. 불이 크게 타오르려면 반드시 불티가 필요하죠. 우리가 초중고 시절 최소한으로 배웠던 여러 글귀들은, 앞으로 기나긴 인생 길목길목에서 별안간 나타나 위로의 불티가 되어줄 수도 있을것이란 생각을 그래서 하게됩니다.
저에게는 조지훈 승무의 제7연에 등장하는 이 부분이 그렇습니다.
'세사에 시달려도 번뇌는 별빛이라'
풍진을 겪어내는 것이 결국 우리네 삶인 입장에서, 가장 필요한것은 어찌됐든 정신적인 부분이 도탄에 들지 않는것이 아닐까합니다. 오늘의 슬픔과 불운이 지나가고난다면, 내일이나 모레, 아니면 다음주. 그도 아니라면 내년 어디쯤에서라도 오늘의 슬픔과 불운만큼의 행복을 담보한다면 사는것이 조금 나아질까라는 생각을 가끔하게됩니다.
춤을 추며 고운뺨에 아롱진 눈물방울은 여승의 번뇌였지만 결국 떨어져내려 별빛이 되었다는 구절을 그래서 저는 좋아합니다.
내리는 비가 창문을 타고 흘러내리는걸 보다보니, 창문이 복사꽃 고운뺨이되고 빗물이 눈물로 방울지는 착각이 일어나네요. 사람은 나이를 먹을 수록 회한이 는다더니 저도 그런것 같습니다.
어찌됐든 누구든간에 어제오늘의 번뇌가 내일의 별빛이 되길 바라는 마음입니다. 그래서 썼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