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부께서 돌아가신지 근 6년이 넘어갑니다. 90이 넘게 사시다 가셨으니 누군가는 천수를 누렸다고 할 수도 있겠고, 저 역시 그런점에 대해선 특별한 감상이 없습니다
저는 어린시절 할아버지댁에서 자랐었기에, 할아버지나 할머니와의 기억이 좀 있는편입니다. 이곳에 언뜻언뜻 그 기억의 조각을 지나가듯 써본적은 있지만 할아버지에 대한 오롯한 이야기는 처음이네요
사실 저희 할아버지, 조부께서는 다정하고 상냥한 분은 아니셨습니다. 소싯적 동네 글선생 했던 양반의 성미란 것은 꼬장꼬장함이 많은부분을 차지하지 않았었나. 저만의 생각입니다
명리학을 수십년 공부하셨으면서도 손자손녀들의 운세를 제대로 펼쳐보여준적은 없었습니다. 저에게는 몇마디 좀 더 얹어준적이 있었지만 조부께서는 항상 손자손녀들에게 그렇게 얘기했더랬죠.
'그런거에 너무 매몰될 필요는 없다. 사주가 좋다고 말하면 나태해질것이고, 나쁘다고 말하면 걱정이 앞설것인데. 인생의 행과 불행을 다 지나고 보면 그게 행이 아니라 불행이었음을 깨달을때가 있고, 불행이라고 여겼던것이 행으로 변하는때도 있다'
그 노인네 편협하시네. 정말 기똥차게 잘보는곳도 많은데.
그렇게 생각하는분도 계시겠죠. 다만 저는 담아둘만한 말이라고 생각했었습니다.
흔히 생각하는 푸근한 모습의 할아버지 느낌은 아니었음을. 이글을 쓰면서도 되새기게 되네요. 불같이 화를 내던 모습도 가끔 있었으니까 손자인 우리들도 할아버지를 편하게 대하지 못했습니다
지난주말에 벌초를 하러 고향에 들른김에 할아버지 묘소도 손을 좀 봤습니다. 그러고보니 당신의 묘자리는 여기여야한다고 말씀하시던 장면이 기억나네요. 완고한 면모가 있던 양반이라 예 그러셔야죠 그랬던것 같은데..
돌아가시기 사흘전쯤에 저한테 전화가 한통 왔었습니다. 전화너머로 들리는 목소리에 아직 힘이 남아있으셔서 별다른 걱정은 하지 않았더랬죠. 근데 그날 할아버지가 저한테 하신 말씀이 이렇습니다
'열심히 살고자 맹렬히 달려온듯 싶었는데 죽을때 되니 그 맹렬함이 덧없다. 주변풍광도 좀 보면서 살았어야되는건데 말이다. 살맞은 멧돼지마냥 살다보니 어딜 지나왔는지도 모르겠구나'
열심히 사신거지 덧없을게 뭐있습니까라는..
무뚝뚝한 손자놈의 헤아림없는 답변에 웃으시더군요. 전화기너머로 잔기침이 섞였지만 아주 오랜만에 정말 쾌하게 웃는소리가 들렸습니다.
건강챙기시고 더 오래 사셔야죠라는 말은 왠지 멋쩍어 하지 못했네요. 웃음소리 뒤로 할아버지께서 그러시더군요
'나는 가끔 네가 무슨생각을 하는가 궁금했는데 오늘보니 그저 별 생각을 안하는거였구먼'
전 그게 제 몇 안되는 장점이라고 얘기했습니다.
단 한번도 통화를 길게이어간적 없던 조부께서 그날은 조금 길게 이런저런 말씀을 하시더군요. 무료하셨던것 같기도, 아니면 마지막이라는걸 아셨을지도.. 그렇습니다
'그래 평생을 쓰잘데기없는 일들에 너무 골똘해봤더니 알겠다. 네가 하는말이 옳다'
통화는 그 말을 끝으로 끊겼습니다. 그리고 며칠 뒤 할아버지께서는 돌아가셨죠
유품들을 정리하는과정에서 수없이 많은 서적들 중 당신이 수기로 직접 작성한 글 몇개를 봤네요. 짤막한 글이었습니다.
명막도어오행(命莫逃於五行)
사람은 오행(운명)에서 벗어날 수 없다라는뜻을 가진 한자어.
명리학에서 유명한 말이라는것을 그때 처음 알았습니다
그 밑에 할아버지가 볼펜으로 달아놓은 주석이 인상깊었네요
- 틀리셨소. 인간이 어디로 길을 잡고 틀지 어찌 함부로 재단한단 말이오. 살아본바 인간의 운명을 저당잡을 수 있는 것은 그들의 자유의지말고는 아무것도 없더이다.
처음엔 당신의 수십년명리학 공부가 모두 허사였음을 자조하는 글로 남기셨나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만.
시간이 지날수록 생각을 고쳐먹게 됩니다. 그렇게 깊이 공부를 하다보니 오히려 인간이 지닌 돌발성, 즉 개개인이 가진 자유의지가 얼마나 예측하기 어려운것인지를 깨닫지 않으셨나 하는 생각 말입니다.
우물물이 정말 나오는지는 깊이 땅을 파본 사람만이 알고 우물터가 아니라는 사실 역시 깊이 땅을 파본사람만이 확실하게 체감할 수 있는것처럼요
가끔 저보고 그런것들에 매몰될 필요없다는 말의 연장선이 저것이었음을 알겠습니다.
많은분들이 여전히 무속신앙에 마음한켠을 기대고 사주를보러 여기저기 입소문 난곳을 찾는것을 알고있습니다. 저 역시 그런행위나 모습들에 그리 부정적인 사람은 아닙니다
저는 그런곳을 찾지않습니다만 대신 로또를 매주 삽니다. 내가 로또를 사는것과 무당, 철학관을 찾는것이 다르면 얼마나 다르겠냐라는 생각을 하게되더군요
다만 제가 이글을 쓰는 이유는 평생 한자로만 이루어진 무언가를 골똘히 보시던 할아버지에 대한 추억 하나와 얼마전 벌초를 하고오면서 되살아 난 기억을 좀 적어봤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