개인의 역사
제 일기의 역사가 30여년에 접어들었습니다. 대단할 것 없는 비루한 일개인의 수기입니다만, 아무튼 쌓인 시간이 그렇게 되었다는것에 대한 소회가 있어 글을 씁니다.
형식도 제대로 못갖춘 일기에 대한 첫기억은 시골 할아버지댁에서 시작합니다.
7살즈음이었네요. 할아버지께선 저녁에 불을 하나켜놓고 뭔가를 적으셨습니다. 밤마다 뭐를 쓰시냐고 궁금해하자 할아버지께서 그러시더군요. 사람은 그날의 생각을 정리할 줄 알아야한다라고요.
그러면서 저한테 공책한권을 던져주셨습니다.
너도 거기에 오늘 하루에 대해 써봐라.
처음 새하얀 지면을 마주했을때의 느낌이란.
위압감이었다고 하겠습니다. 이 넓디넓은 공간을 그림도 아니고 글만으로 채워야한다니.
불가능한 일이었습니다. 펜을쥐고 뭐라도 끄적여보려했습니다만 두줄 채우기가 어려웠네요. 개인 일대기를 적는 행위라는 말이 일곱살 꼬맹이에게는 지나치게 무거웠습니다. 그 중압감이 백지를 더 넓고 크게 보이도록 만들더군요.
머리만 벅벅긁으면서 있으니까 조용한 몇마디가 들려왔습니다.
오늘은 한줄만써라. 너 오늘 개랑 산에 다녀왔지않느냐. 그걸 써라.
그것만 써도 되는거냐는 물음에 그럼 위인전 쓰려고 했느냐는 농담이 돌아왔습니다. 그때부턴 공책 들여다보는 마음이 좀 편하게 되지 않았나싶습니다.
나는 오늘 동생이랑 강아지를 데리고 산에 다녀왔다
제 첫 일기였습니다. 일기를 써야겠다는 자각으로인한 기록이 아니다보니 이후에도 줄글 길게 쓰는 것은 머나먼 얘기였죠. 매번 어디가서 개구리잡았다 뱀봤다 토끼를봤다 비가왔는데 지렁이가 기어나왔다 이런식의 나열일 뿐..
제 30여년의 일기역사 중 10여년은 그러니까 나라는 사람의 자각과 의지를 가지고 쓴게아니라 흉내만 내는 수준이었던거죠. 그래도 사람은 뭔가를 오래하다보면 요령이 생기기 마련입니다. 머리가 조금씩 굵어지면서, 일기라는 틀안에 내가 생각한 것들을 녹여내는 방법이 손끝에 잡히기 시작했습니다.
특히 힘들거나 서러운 일을 당했을때. 어떠한 고통을 절절하게 느낄때.
그런 날일수록 저는 일기를 꼭 썼습니다. 굳이 돌이켜봐도 유쾌한 감정으로 변하지 않을것이란 걸 알고, 이런걸 나 스스로 어딘가에 남긴다는 것 자체가 상처를 더 후벼파는행위인 것처럼 느껴질때도 반드시 그 시간을 제 손으로 새기듯 일기에 적었습니다.
사무치는 감정들이 그렇게하고나면 사라져서가 아니었습니다. 단지 제가 그렇게 하는 이유는 단한가지 이유 때문이었습니다.
그 시기가 모두 지나고 난 뒤 제가 적은 그 날의 일기가 과거가 되고 나면. 어느 한 날 고통속에 적었던 일기를 들춰보게 됩니다.
이때의 나는 지금의 내가 상상할 수 없던 고통에 시달리는 중이었구나. 그런 작열과 같은 고통이 지나간 후에도..
그럼에도 나는 다시 '나' 자신으로 살고 있다.
니체가 나를 죽이지못한 고통은 나를 더 강하게 만든다고 했던가요. 사실 저는 고통과 시련 이후 더 강해지는 소년만화 속 주인공같은 사람은 못됩니다. 다만 견디고 난 뒤 일정시간이 지나면 그냥저냥 '나'로 살 수 있구나정도만을 경험으로 깨우친 그저 그런 인간일뿐이죠.
어찌보면 모든 것은 지나간다는 말의 체득을 저는 이 지나간 일기로 하고 있는셈입니다. 전에도 분명히 그랬으니까 이번에도 결국 지나가리라는 확신이 기록으로 남겨져있는 것. 그 사실 자체가 스스로에게는 많은 위안이 됩니다.
그러니까...
어떻게보면 일기는 내가 세운 소소한 공적비이기도 하고, 지나간 상처에 대한 스스로의 위령탑이기도 하지않나.
그렇습니다.
물론 30여년넘게 쓴 일기장을 다 뒤적이지도 못하고 어릴때썼던 것은 이사를 여러번 거치며 사라진 것이 태반입니다. 무엇보다 그 많은 낡은 공책을 누가 다시 읽겠습니까. 다만 이제 나라는 사람을 돌아보고자하는 확실한 관념이 생겨난 이후 쓴 것들은 대부분 기억이 납니다.
어떤 시점에 내가 이런일을 겪었었구나 정도의 압축된 조각으로 말이죠. 꼭 세세하게 다 기억할 필요는 없잖습니까. 필요할때 기억 한 조각을 펼쳐보면 희미하게 흩뿌려져있던 과거의 편린들이 오와 열을 맞춰 선명하게 되살아나는 경험. 아마 많이들 해보셨을겁니다.
요즘도 일기를 씁니다. 커뮤에 쓰는글이 일기를 대신할때도 아주 가끔 있네요.
다만 예전처럼 매일쓴다거나 길게 써야한다는 강박에서는 벗어난지 오래입니다.
일기를 한줄만 쓰는 날도 있고 보름이상 안 쓴날도 많이 있습니다. 어떤때엔 그날 인상깊게 느꼈던 단어나 문장, 아니면 기분 정도만 끄적인적도 많죠.
일기는 나만알고 나만보는 기록물입니다. 내가 어떻게 무얼 쓰든 아무 상관없습니다.
지나고보니 그다지 품을 들이지 않으면서도 딱히 단점이 없는 개인활동이 아니었는가.
일기에 대한 소감입니다.
별거 아닌 나 자신에 대한 기록물의 년수를 세어보니 쓸데없이 오래되었구나라는 생각에 별재미도 없는 글을 길게 썼습니다.
어쨌든 이게 오늘의 제 일기가 되기도 하겠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