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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강다로 May 22. 2024

송나라의 최후. 망국의 비장함에 대하여.

애산전투


흔히들 송나라하면 유명한것이 나라 수준에 맞지않는 나약한 군사력. 그에 반해 문화는 융성했던 기이한 국가라는 평가가 많죠. 재밌는것은 군사적약체로 평가받던 송나라가 몽골에게 아주 오랜기간 견뎌가며 결사항전을 이어갔다는것인데요. 몽골은 자기들 턱밑에 위치한 국가가 쓰러지고 곧 꺼질 등불 같은것들이 계속해서 심지가 사라지지않으니 이곳에 애를 많이 썼습니다.

남송의 마지막에는 불세출의 충신들이 있었습니다. 송말삼걸이라고도 일컬어지는 인물 셋이 그 대표격이라 할 수 있겠죠. 장세걸,육수부, 그리고 문천상.

유라시아를 집어삼키고 들불처럼 모든것을 태워버릴듯이 전진만을 거듭하던 몽골은 남쪽 끄트머리 애산에서 남송의 멸망을 목전에 두었습니다. 목적은 거의 이루어진거나 다름없었습니다.

당시 애산에는 최후까지 나라를 위해 결사대로남은 의병 20여만명과 나이가 어린 황제 소제(당시 나이7살), 지고의 충신 육수부와 장세걸이 있었습니다. 의병이 20만명이라고는 하나 이미 몽골의 군사들은 재련될대로 재련된 칼처럼 날카로움을 지닌 정예였으니 상대가 될리 없었죠.

패배는 빠르게 다가왔고 송나라의 국운은 결국 애산 앞바다에서 꺾이게 됩니다.

사실 이런 단편적인 역사의 사실은 다소 드라이합니다만, 남송의 최후는 중국역사에서도 유래가 드물만큼 비장한것이었습니다. 약300여년을 이어온 송나라는 최후에서 그래도 결기가 있는 국가였음을 보여주었는데요. 당시 승상이었던 육수부는 화살이 빗발치고 패배가 경각에 달렸을때에도 배안에서 자신의 어린 황제에게 '대학'을 강론하였다합니다.

패배가 기정사실화 된 상태에서 육수부라는 충신은 고작 7살난 황제를 보며 어떤생각을 하였을지 쉽사리 짐작하기힘듭니다. 그 상태에서도 대학따위 경전이나 강론하고있으니 나라가 망했지라고 핀잔하는분들도 계시겠지만, 저는 조금 다르게 보고싶습니다. 평생 책을 벗삼아살고 일신을 국가에 헌신했던 이 중년의 승상에게 어린 황제는 아들과 다름없는 존재였겠죠. 화살비가 내리고 자신의 백성들이 죽어가는 아비규환 속, 평생 글을 놓지않던 사대부입장에서 아이를 달래는법이 뭐가 있었을까 싶습니다.

아무튼 그렇게 적병들이 눈앞까지 다가오자 육수부는 어린 황제를 등에업고 이렇게 말하였다 합니다.

'죵묘사직의 이어짐이 이제 끊겼으니 만사가 휴의이옵니다. 살아서 오랑캐들에게 능욕을 당하느니 이 노신과 함께 바다에 몸을 던져 선제들을 뵘이 떳떳할것이옵니다.'

이에 대해 등에업힌 소제의 대답이 안타깝습니다.

'내 다시는 왕후장상의 씨로 태어나지 않겠다'

그렇게 육수부와 송 마지막 황제였던 유주는 물에 뛰어들어 익사합니다.  

이렇게 애산전투를 마지막으로 송은 멸망합니다.

이 애산전투에서는 특별한점이 하나 더 있는데요. 이 송나라의 마지막까지 함께한 '시'씨가문의 존재때문입니다. 시씨가문은 본래 송나라 이전 후주라는 국가의 왕족이었습니다. 그리고 후주가 멸망하고 송태조 조광윤이 송나라를 건국하면서 시씨가문에게 '단서철권'을 하사합니다. 이 과정이 특별한것은 왕조가 바뀌고 나라가 바뀌게 되면 이전 왕족들은 모두 숙청되는것이 일반적인 역사인데, 조광윤은 후주의 시씨가문에 위해를 가하지 말라며 단서철권을 내린것이죠. 참고로 단서철권은 나라에 큰 공을 세운 신하에게 내리는 면책권 같은 것인데, 이전 왕조가문을 멸족시키지않고 이런 특혜까지 준것이 특이하다고 볼수있습니다.

아무튼 송태조 조광윤이 송나라를 건국한이래로, 시씨가문은 훌륭한 대접을 받았습니다. 태조가 면책권을 내린것이니 그 이후 황제들이나 신하들이 그 명을 어길수는 없는법. 시씨가문은 그렇게 송나라에서 잘살았죠.

송태조 조광윤의 300여년전 유지에 대한 보답일까요? 송나라의 최후였던 애산전투에 이 시씨가문 역시 참전하여 끝까지 결사항전을 벌입니다. 이미 망국의 길로 접어들고, 패배가 확실한 상황에서도 이들은 송소제의 곁에 남았다고합니다.  이전 국가왕조의 가문이 후대왕조의 마지막까지 함께하여 비장한 최후를 맞은것이 묘한 울림을 줍니다. 300여년간의 은혜에 대한 보답을 결국 그들 가문의 목숨으로 갚으려하였으니 송나라의 최후가 마냥  비참하다고만 볼것이  아니지않나싶기도 하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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