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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강다로 May 22. 2024

외할머니가 말씀해주신 '범'에 대한 기억.

저는 어린시절부터 동물을 좋아해서 동물다큐나 책같은것을 자주 봤었습니다. 그렇다보니 외할머니께서는 저한테 직접 본 동물에 대한 이야기를 자주해주셨는데요
흥미로운 이야기들이 무척 많았지만 그중에서도 제일이었던것은 할머니께서 어린시절에 보았던 범에 대한 이야기였습니다

할머니께서 어린시절일때는 먹을것이 없다보니 어린여자아이들은 동네에서 모여 산으로 나무줄기나 나물을 캐러 올라가셨다고해요. 그런데 다들 어리다보니 막상 산에가도 수다떠는 시간이 더 많았고 그러다보니 산에오르는게 재밌던 시절이셨다고 합니다.

그 동네에서 어르신들이 산에 오르는 여자아이들한테 꼭 신신당부 하셨던 말씀이 있으셨다는데 그건 꼭 오후4시 이전에는 산에서 내려오라는 얘기였답니다. 그 이유가 그 산에는 범이 나오니까 해지기전에 내려오라는 말씀이었다네요. 그런데 할머니도 그렇고 친구분들도 그렇고 뒷산에 그런 범이 어딨냐는 생각을 하셨고 대수롭지 않게 여기셨답니다. 그리고 4시쯤에 내려오라는 말은 저녁준비해야하니까 내려오라는 말로 아셨다구요.

늦가을 무렵에도 그런 생활은 이어졌다고 합니다. 동리 여자아이들끼리 산에올라가서 나물캐면서 웃고 떠들다가 내려오는 그런 날중에 어느날. 그날은 이상하게 수다가 더 재밌어서 시간가는 줄을 모르고 있었다네요. 그러다가 어느순간 주변이 어둑어둑해지는걸 깨닫고보니 아차 늦었다 싶으셨답니다. 저녁준비를 하려면 빨리 내려가야하니까 이제 친구들한테 내려가자고 말을 꺼냈는데 갑자기 친구 하나가 시선을 어느한곳에 두고 장승처럼 서서 멈춰있더랍니다.

할머니가 그래서 그 시선을 따라가봤더니 저 뒤쪽 커다란 등치 나무 옆으로 굵고 긴 뱀같이 생긴거 하나가 주욱 뻗어 있었다네요. 주변이 어둑하다보니 혹시 뱀인가 싶었는데 생각해보면 뱀은 또아리를 틀거나 나무등치를 감던지 해야하는데 슬쩍슬쩍 움직이기만할 뿐 그 움직임이 대중없었대요

그래서 뱀대가리를 찾으려고 나무등치께를 눈으로 훑는데 그 반대편으로 커다란 짐승 대가리가 불쑥 튀어나왔다고합니다. 그리고 그 짐승이 눈을 한번 껌뻑였는데 그 빛이 너무 형형해서 딱 보는순간 아 저게 그 범이구나 생각하셨다고합니다. 몸통은 커다란 나무에 감춰져서 잘 안보이는데 안광이 마치 한밤중 유성우가 쏟아지는것처럼 밝았다네요.

당시 동네 어르신들이 혹시라도 산에서 범을 마주치면 절대 뒤돌지말고 그대로 눈을 마주친상태에서 여러사람들과 같이 천천히 뒷걸음질을 치라고 하셨다합니다. 범이란 짐승은 영악해서 자기눈을 피하면 약한놈으로 알고 필히 공격한다구요

할머니와 친구분들은 그래서 한참을 그 형형한 안광을 마주보면서 천천히 뒷걸음질을 치셨답니다. 그런데 그게 뒷걸음질이라해봐야 산에서 쉬운일이 아니기도하고 겁나기도해서 많이는 도망칠수가 없었대요. 시간이 얼마나 흘렀을까.. 이미 한밤중이 된거처럼 주변은 깜깜해지는데 자신들을 마주보는 그 큰 짐승의 안광은 갈수록 더 밝아지더랍니다. 살면서 그렇게 번쩍이는 불빛은 못봤다고 회상하셨던걸 보면 그때의 기억이 무척 강렬하셨던거같아요

아무튼 그러다가 어느순간 불빛이 훅하고 꺼지더니 주변이 새카매지더래요. 정말로 갑자기 불빛이 휙하고 사라졌답니다. 할머니랑 친구분들은 그게 더 무서워서 어찌할바를 모르고있는데 이제 그때 뒤에서 동네어르신들이랑 남자들이 할머니와 친구들을 찾으려고 산에 올라오고계셨답니다. 여기저기 소리를 지르고 꽹가리같은것들을 치셨다고 하네요.

제가 처음 그 이야기를 들었을때 혹시 그게 호랑이가 아니었냐고 물었더니 할머니께서도 분명 호랑이일거라고 믿고 사셨다고합니다.

그런데 그로부터 수십년이 지나고 동물원에서 호랑이를 실제로 보고 표범을 보고나니까 아마 표범이었던거 같다고 하시더라구요. 그러면서

'근데 동물원 표범들은 애들이 좀 잘더구먼. 그 때본놈은 대가리가 훨씬 더 컸는데..'
라고 하신말씀이 기억에 남습니다.

그리고 오히려 그 형형하던 눈보다도 처음봤던 꼬리가 너무도 생생하게 기억에 남는다고 하시더라구요. 굵기도 굵기인데 그 묘하게 매끄러운 털뭉치가 소름끼칠정도로 예쁜 뱀같았답니다. 사람을 홀리려고 가끔씩 움직이는것처럼 길다랗게 뻗은 그 꼬리가 소름이끼치면서도 너무 예뻐서 아직도 눈에선하다고 하셨었네요.

외할머니께서는 4년전에 돌아가셨는데 가끔 이런저런 말씀해주신것들이 기억에 남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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