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과를 가진 자 vs 못 가진 자

에피소드 16. 인생에 해법서는 없다.

by 고강훈

어릴 적 나는 전과자를 아니 전과를 가진 자를 부러워했었다.

나도 전과가 있었으면 더 잘했을 것이다.

그렇다. 여기서 전과는 범죄 전력도 아니고 학과를 옮기는 것도 아니다.


바로 초등학교 학습 참고서를 말한다. 지금은 자습서로 불린다.

내 기억으로는 교학사의 표준전과와 동아출판사의 동아전과는 양대 산맥이었다.

교과서로만 공부하던 시절 방과 후 숙제를 마치고 놀러 나가기 바빴는데 숙제를 놓치는 날에는 밤늦게까지 숙제와 씨름을 했던 기억이 난다.


그런데 똑같이 놀고, 일찍 잤다고 하는 녀석이 숙제를 완벽하게 해 오는 걸 보고 많이 놀랐다. 공부는 내보다 못한 것 같은데 너무 완벽해서 의심스러웠다.


어느 날 그 친구 집에 놀러 갔는데 책꽂이에 두꺼운 책이 보였다.

전과였다. 초등학교 시절 학습의 신세계였다.

420813005_7208210615910733_2660763071132399591_n.jpg 전과의 챔피언 <표준전과>




내가 생각하는 전과는 그 시대의 '부의 상징'이었다.

그 시절 짜장면 한 그릇 500원이었다.

어렴풋이 전과는 5천 원 정도 했던 기억이 난다. 만 원까지 올랐나? 기억이 가물가물하다. 아무튼 그 정도의 금액은 적은 금액이 아니었다.

가정 형편이 좀 괜찮은 친구들이 전과를 가지고 있었다.

나는 살 형편이 안 되어 약간 얇은 이달 학습, 저 달 학습, 완전 학습, 모범 학습 같은 문제지로 참고할 정도였다. 가격은 현저히 낮았으니, 손에 넣기 그나마 수월했다.

공부를 좀 하거나 선생님 눈에 띄면 교사용 전과를 받을 수 있다.


성적이 좋거나, 학급에 모범이 되는 사람은 전과나 문제집을 부상으로 주던 때가 있었다. 반장(학급 운영위원)은 담임선생님의 기분에 따라 전과를 획득하기도 한다.

난 졸업 때까지 맨 앞에서 선생님의 침을 받아먹고살았기에 운 좋으면 전과를 던져주고 가실 때가 있다. 선생님이 수업 용으로 사용하시는 교사용 전과다. 근데 학기가 끝날 때 주신다. 학기 초에 주면 좋은데 하면서 아쉬움을 토로할 때가 있었다.


학기 초가 되면 동네 서점 주인이 선생님 책상에 각종 문제집이나 전과를 주고 가는 걸 분명 봤다. 일종의 영업이었겠지.

간혹 선생님은 수업시간에 문제집을 홍보하기도 했다.

"문제집은 이달학습으로 공부해라." 이런 강요의 느낌으로....




담임 선생님은 숙제를 절대 전과를 보지 말라고 했지만, 숙제를 빨리하고 나가 놀려면 꼭 필요했다. 그래서 친구 집에 숙제하러 간다고 하고 놀러 간 적이 많았다.


어떤 친구는 전과를 통째로 외워서 항상 100점을 먹기도 했다.


또, 어떤 친구는 전과사라고 부모님께서 주신 돈으로 '아이큐 점프' 만화책이나 구영탄이 나오는 만화를 사기도 했다. 외인구단이나 남벌 같은 만화책도 사기도 했다.


맥락도 없고 뜬금없이 전과의 추억이 생각나서 글로 옮겨보았다.


당시에는 학원이라는 것이 없었기에 참고서 자습서, 문제집에 의존했던 기억을 떠올려 보게 된다.

표준이었던 전과의 챔피언 표준전과는 사라졌지만, 동아출판사의 동아전과는 자습서로 지금도 출판이 되고 있다. 역시 왕이 살아남는구나.

420806044_7208210619244066_7695441714919391475_n.jpg 전과의 왕 <동아전과>


인생에 표준도 없고 해법서도 없다.

참고만 할 뿐, 자습해서 스스로 개척하자.

단, 전과자는 되지 말자.


#참고서 #전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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