흰(2016)을 읽고
꽃구경을 다녀온 날 한 카페에서 흰(2016)을 읽었다. 당시에는 느끼지 못했는데, 그날, 유달리 흰 것을 많이 만났다. 경기도 오산에 있는 물향기 수목원 도처에는 꽃이 만개했는다. 나는 벚나무가 아니어도 하얗고 작은 꽃을 피울 수 있다는 것을 그날에야 깨달았다. 이팝꽃과 조팝꽃이 피지 않았기에 지금 피었으면 어련히 벚꽃이었거니 넘어간 꽃의 이름은 매화였고 살구꽃이었다. 흐드러진다는 말이 어울리는 벚꽃과 다르게 매화는 도도하다는 말이 떠올랐고 살구꽃은 생의 기운을 잔뜩 머금고 있었다. 머릿속 사전에 흰 것에 대한 새로운 이름이 추가됐다.
'소설' 흰(2016)은 살구꽃처럼 작고 흰 것들에 대한 짧은 메모로 이루어져 있다. 이것을 소설이라 부를 수 있을까라는 의문부호를 붙이게 하는 느슨한 연결은 놀라울 정도의 높은 해상도로 이 세상에 몇 시간 존재하지도 않았던 '그녀'가 누렸을지도 모를 삶을 담는다. 작가 본인인 것처럼 보이는 '나'와 작가가 삶을 부여한 '그녀'를 동일한 위상으로 바라보게 되는 것은 작가가 두 인물을 서술하는 방식이 현실 세계에서 한 사람이 다른 사람을 인식하는 자연스러운 방식과 닮았기 때문이다. 우리는 친하거나 가까운 누군가를 '안다'라고 표현하지만 그것이 그의 인생 전체를 속속들이 안다는 뜻은 아니다. '나'가 '너'에 대해 알 수 있는 것은 '너'와 함께 겪은, 또는 누군가에게 전해 들은 에피소드이며, '나'는 내 나름대로 그 짧은 단면을 선으로 이어 비로소 '너'라는 사람을 인식하게 된다.
가장 자연에 가까운 방식으로 '그녀'에게 삶을 부여한 작가의 동기는 애도의 정서다. 수많은 이들이 살해당한 폴란드 거리와 그가 (소설 집필 시점에) 출간했던 책에 담긴 광주의 거리. 출발지와 도착지에 흐르는 애도의 정서의 격차가 그가 글을 쓰게 한 계기일 것이라 추측한다. 죽은 이에게 흰 것을 줄 것이라는, 흰 것을 주려는 그 마음을 주저하지 않을 것이라는 작가의 말은 애도의 마음을 부끄러워하지 않겠다는 개인적이고 사회적인 선언이다. 최근에 읽은 책 살아 있는 자를 위한 죽음 수업(2024)에서 법의학자인 저자는 한국 사회에서 참사를 대하는 방식이 처벌과 보상뿐이라 지적했다. 비슷한 두 시기에 읽은 두 책을 이어 생각해 보건데 - 애도의 정서가 충분히 성숙하지 않은 사회에서 구성원은 충분히 슬퍼하지 못하고 충분히 위로하지 못한다. 마음의 훈련이 되지 않은 상황에서 사회는 시급히 '문제'를 해결하려 하고 그로 인해 더욱 애도의 정서가 성숙하지 못한다. 충분히 애도하는 훈련을 해야 한다. '나'가 아닌 '너'가 겪은 죽음에도 애도하는 훈련을 해야 한다.
부쩍 풀이 자라는 4월에 화마가 기승이었다. 경상도 지방에 사는 부모님께 안부 전화를 드리며 산불 이야기를 하며 안타까운 마음이 들면서도 부모님에 대한 애틋한 마음이 커져감을 느꼈다. 산불로 피해를 입은 모든 이에게 위로의 말씀을 전하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