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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정성훈 Jun 20. 2019

여행에 미친 여자와 결혼했다

16) 배우자


 과식을 하진 않더라도, 국밥 한 그릇 정도는 거뜬히 비우는 그녀였다. 하지만 여행을 떠난 후부터 그녀는 음식을 남기기 일쑤였다. 이유를 물으면 늘 배가 부르다고, 충분히 먹었다고 했다.


 그렇지 않아도 살을 좀 찌워야 하는 그녀인데, 더 빠지는 건 아닌지 걱정을 하면서 남긴 음식은 내가 먹었다. 아까워서.

 남미 여행이 조금 고생스러웠고 많이 걸었기 때문인지 나는 잘 먹었음에도 살이 빠져 다행이었지만, 다시 한번 그녀가 걱정이었다.


 그렇게 그녀가 소식을 한 지 한 달쯤 되었을까. 칠레의 수도인 산티아고에 도착한 우리는 큰 마음먹고 한식당에 가기로 했다. 짠내 투어를 하고 있는 우리에게 외국에서의 한식은 너무 비쌀 뿐만 아니라, 특히 남미엔 한식당도 많지 않기 때문에 어쩔 수 없이 피자, 햄버거와 같은 패스트푸드나 현지식으로만 끼니를 때워야 했다.


 그러던 중 산티아고에 비교적 한식당이 많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고, 수소문 끝에 숙소에서 가까우면서 평도 좋은 한식당을 찾게 되었다. 우리는 너무너무 먹고 싶었던 떡볶이와 저렴하면서도 실패하기 힘든 메뉴인 비빔밥을 주문했다.

 다행히 두 메뉴 모두 맛은 있었지만, 매운걸 못 먹는 그녀가 먹기엔 떡볶이가 다소 매웠다. 나에게도 좀 매울 정도였으니 분명 매웠다.


 하지만 그녀의 수저는 비빔밥과 떡볶이를 오가며 쉬지 않았다. 맵다고 외치고 있는 입을 틀어막으려는 듯 떡볶이를 쉬지 않고 집어넣었다. 맵지 않냐고 물었더니 맛있게 매운 건 괜찮다는 궤변을 늘어놓았다. 배부르지 않냐고 물었더니 언제 다시 올지 모르는 기회라고 했다.


 그랬던 것이었다. 그녀는 한 달 동안이나 단지 살기 위해 밥을 먹은 것이었다. 그녀는 한 달 동안이나 음식이 입에 맞지 않았던 것이었다.


 자기가 하자고 한 여행이라 부정적인 모습을 보이고 싶지 않았던 것일까. 여행을 좋아하는 만큼 외국에 잘 적응하는 모습을 보여주고 싶었던 것일까.

 하지만 그녀는 뼛속까지 한국인이었고, 한 달 만에야 연기가 아닌 진짜 배부름을 표현했다. 바닥이 훤히 보이는 그릇이 그 증거였다.


 그 후로 정말 가끔 한식을 먹거나 입에 맞는 음식을 먹을 때가 있었다. 그럴 때마다 상대적으로 먹는 게 느린 그녀는 나에게 천천히 좀 처먹으라며 걱정을 해 주곤 한다.

 나 체할까 봐 그런 거라는데 맞겠지...?








 나는 전형적인 올빼미 기질을 가지고 있다. 어릴 적부터 그런데다, 낮에 한가하고 밤에 바쁜 직업 덕분에 커서도 변함없이 그렇게 살아왔다. 깨끗하게 씻고 잘 준비를 마친 후 침대에 누워 핸드폰을 켜는 시간이 나에겐 가장 행복한 시간 중 하나다.


 그녀도 일찍 자는 편은 아니지만, 새벽 1시 이전엔 대부분 잠에 든다. 어느 날 그녀가 잠을 청하려다 말고 나에게 말한 적이 있다. 자기는 예민한 편이라 옆에서 불빛을 켜고 있으면 잠을 잘 수가 없다며 시간도 늦었으니 핸드폰 그만하고 자자고 말이다.


 그럴 때면 나는 수긍하고 폰을 놓고 잠을 청하기도 하고, 아직 보고 싶은 기사나 웹툰 등이 남아있으면 이불속으로 들어가거나 침대 옆으로 폰을 내려 최대한 방해가 안 되게 보곤 한다.


 그러던 어느 날, 새벽에 꼭 봐야 하는 축구 빅매치가 있었다. 정말 꼭 보고 자고 싶어서 그녀에게 양해를 구했다. 불빛에다 소리까지 들려 방해가 되겠지만 한 번만 봐줄 수 없겠냐고, 시도해보고 도저히 잠들기 어려우면 그냥 끄고 자겠다고 말이다.


 정중한 나의 부탁에 감복했는지 그녀는 오늘 하루만이라며 알겠다고 했다. 그렇게 TV 불빛과 중계 소리 속에서 잠을 청한 그녀는 이내 잠이 들었고, TV 속 전광판은 축구 시작한 지 겨우 42초가 지났음을 나타내고 있었다.

 한참 축구를 보다가 후반전 중반 무렵 내가 잠이 들 때까지 그녀는 한 번도 깨지 않았다. 그리고 아침에 일어나니 TV가 그대로 켜져 있어서 내가 껐다.


 다음날 그녀에게 어떻게 된 건지 물었더니, 어제는 유독 피곤했다고 했다. 그 후로도 그녀는 날마다 유독 피곤한 건지, 핸드폰 놓고 자자는 말이 끝나기 무섭게 잠이 들었다. 내가 영상을 보든 밖에 나갔다 오든 깨지 않았다.


 이후에도 몇 번 그녀는 자신의 예민함을 어필했고, 그때마다 비웃음과 함께 뻥치지 말라는 나의 놀림을 받아야 했다. 그리고 그 놀림이 싫었는지, 언제부턴가 내가 폰을 보든 말든 아무 말 없이 그냥 잘 잔다. 아주 곤히.


 둔한 이미지보단 예민한 이미지이고 싶었던 것일까.


 아직도 의문이다.








 세계여행을 떠나기로 한 후, 이것저것 의논하고 준비하면서 그녀는 나에게 여행 사진을 찍어보는 게 어떻겠냐고 했다. 그 말에 수긍한 나는 오직 ‘감성’ 때문에 쓰고 있으면서, 카메라가 좋아서 쓴다고 합리화하고 있는 아이폰을 꺼내 들었다.


 하지만 그녀는 셀룰러 폰 렌즈 따위로는 절대 카메라 렌즈를 따라갈 수 없다며 나에게 카메라를 하나 장만할 것을 권유했다.


  미적 감각에 대한 갈망이 있던 나는 그녀의 말에 혹했고, 카메라는 하나 사두면 앞으로도 쭉 쓸 수 있으니 사도 낭비는 아니라는 호구성 자기 최면을 걸고 검색을 시작했다.


 군대를 전역한 지 얼마 되지 않아 한참 감성에 젖어있을 때, 출사라는 것을 다니며 사진여행을 하는 지인을 보고 자극을 받아 디지털카메라를 산 적이 있다.

 나름 열심히 구도를 잡고 포즈를 요구하기도 하며 셔터를 눌러댔지만, 사진을 발로 찍었냐는 말만 여러 번 들었다. 내가 찍은 풍경 사진을 내가 봐도 ‘이건 왜 찍었을까.’ 싶었다.


 그때 이후로 카메라를 손에 쥔 적이 없기 때문에 사진이든 카메라든 아는 게 아무것도 없었다.


 몇 날 며칠을 카메라에 대해 알아보다 보니 카메라의 가격, 설정값, 렌즈 등이 더 복잡하게 느껴졌고, 고민 끝에 사진은 그냥 폰으로 찍고 영상 촬영용 카메라를 따로 구입하기로 하여 액션캠을 알아보게 되었다.


 조용히 상황을 지켜보던 그녀가 내게 다가와 넌지시 말했다. 영상보단 사진을 찍을 일이 훨씬 많을 거라며 카메라를 사는 게 나을 거라고 나를 설득했다.

 카메라 조작의 어려움에 대한 고충을 털어놓자, 그녀는 기다렸다는 듯이 하이엔드 카메라에 대해 알려주었다. 설정, 렌즈 등 아무것도 건드릴 필요 없이 자동으로만 찍어도 평균 이상은 한다며 나 같은 초심자에게 딱 맞을 거라고 했다. 모델명까지 추천해주었다.



 여행한 지 4개월 정도 지난 지금, 분명 내가 산 나의 카메라는 그녀의 손에 매달려 있다. 블로그를 하는 그녀는 한두 번 내 카메라로 사진을 찍더니, 확실히 화질이 다르다며 감탄을 아끼지 않았고 카메라를 빌리는 빈도가 차츰 늘어갔다.

 매번 기록을 남겨야 하는 그녀의 손에 카메라가 쥐어지는 게 점점 당연해졌고, 어느덧 나는 가끔 필요할 때만 그녀에게 카메라를 빌리고 있었다. 내 것처럼 편하게 쓰라며 그녀는 흔쾌히 빌려주었다.


 그러던 어느 날, 나는 카메라에 대해 알아볼 게 있어서 인터넷 검색을 하다가 우연히 한 가지 사실을 알게 되었다. 블로거들이 가장 많이 사용하는 카메라 1위가 바로 내가 산 그 카메라였다.


 나는 그녀에게 따져 물었고, 그녀는 절대 의도한 게 아니라며 몰랐다고 했지만 나는 그 말을 믿을 수 없다. 이건 계획된 범죄가 틀림없다.



배우(配偶) : 같은 말 = 배필(配匹), 부부로서의 짝


배우(俳優) : 연극이나 영화 따위에 등장하는 인물로 분장하여 연기를 하는 사람



 나는 여행에 미친 배우자와 결혼했다.



고독한 척 연기를 하고 있다.






*세계여행 사진들은 여기에서​ 확인하실 수 있어요!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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