밥을 먹지 않아 살이 계속 빠지다 보니 면역력이 나빠졌다. 밤새 틀어놓은 선풍기 바람만으로 감기가 왔다. 목이 간질거리더니 이내 콧물까지 훌쩍이길래 내과를 방문했다. 대기시간은 길지 않았다. 정신과와 달리, 내과는 그냥 병원이니까.
드문드문 앉아있는 사람들을 두리번대고, 틀려있는 TV도 좀 보다가, 잡지도 뒤적거렸다. 내 이름이 호명됐고, 진료실로 들어갔다. 익숙한 진찰이 이어졌고, 끝으로 의사는 내게 현재 복용 중인 약이 있는지 물었다. 나는 신경성으로 위염약을 간헐적으로 복용하고 있으며 정신과 약의 성분명과 mg을 일러줬다. 잠시 몇 초의 불길한 정적이 흘렀다.
'뭐지? 설마 촌스럽게, 그것도 의사가, 정신과에 대한 거부감이 있는 건 아니겠지. 지금은 2020년이고 이곳은 GDP 규모가 10위에 달하는 경제 선진국 대한민국의 수도 한복판에 위치한 병원인데, 설마.'라고 지금 글을 쓰다 보니 그런 생각이 든다.
의사는 내 얼굴과 모니터 화면을 곁눈질했다. 아마도 내 개인정보를 봤으리라. 그리고는 다시 화면을 보고 타자를 치며 말했다.
"예쁘고, 집도 잘 살고, 어리고, 부족함이 없는데 뭐가 그렇게 걱정이 돼요?"
'뭐지? 요즘은 예쁘다는 칭찬을 이따위로 하나? 그리고 우리 집이 잘 사는지, 쥐뿔도 없는지 당신이 뭘 안다고?'라는 생각이 지금 든다. 하지만 그때 나는 넋이 나간 채로 길을 걸어 다녔고, 그 순간 그 말에 당연히 벙쪘다. 그리고는 속없이 웃으며 멍청한 소리를 했다.
"하하, 그러게요."
"하긴, 원래 그럴수록 더 우울하기도 하죠."
그리고는 뭐가 그렇게도 감사한지 연신 고개 숙여 인사를 하고는 처방전을 받아 들고 병원을 나왔다. 이게 다 정신과 선생님의 인자한 미소 때문이다. 방심했다는 것이 아직도 분통하다. 지금의 나라면 복수할 수 있는데, 스물도 아니고 이제 곧 서른이 공격력을 상실한 채로 밖을 걸어 다니다니. 하지만 그때는 판단능력 같은 것이 없었고, 머릿속은 늘 백지상태였다. 1층으로 내려와 약국 문 앞을 잠시 서성였다. 그리고는 처방전을 찢어 버리고 집으로 돌아왔다. 마음의 감기나 무섭지. 몸의 감기 같은 건 어차피 약 먹으면 7일, 안 먹으면 일주일이면 낫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