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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gaon Aug 03. 2020

인생의 무게중심

 나는 비를 사랑한다. 비가 오면 소소한 향기들이 진해지기 때문이다. 옅은 사람의 체취, 무심코 지나친 가로수길의 흙냄새, 따뜻한 아메리카노의 향, 오래된 책 종이 냄새 같은 것들. 작은 것들의 소중함을 상기시키고 거기서 행복을 찾게 해주는 날씨를 사랑하지 않을 수 없다. 나는 그런 것들에서 행복을 찾을 줄 아는 사람이었다. 얼마 전 까지는. 거기다가 비가 내리다 그치기를 반복하는 날이면, 그 여백의 시간 동안 누리는 공기와 바람은 정말 사람의 영혼을 치유한다. 그런 날의 바람은 그냥 불어오는 것이 아니라 사람을 안아준다. 그 어떤 부정적인 감정도 쉽게 녹아내리게 만들어서 나는 비가 오면 늘 컨디션이 최상이었다.


출처 : 내 앨범, 비올 때는 가라앉으면 꼭 나무 사이를 걸어보세요.

 

하지만 우울증은 단연 비와 상극이다. 장마 예보를 미리 확인해 사촌언니와의 점심 약속을 잡아두었다. 평소에는 가지도 않던 브런치 카페에서 점심도 거하게 먹었고, 날씨도 산책하기에 최적의 상태였다. 비가 오다 그친 탓에 구름이 적당히 가려서 해는 눈부시지 않았고, 온도는 적당히 시원해 나부끼는 반팔과 반바지의 촉감까지 완벽했다. 모든 것이 적당해 도깨비의 공유가 울고 갈 바로 그런 날씨. 기분도 적당히 밝아진 채로 돌아왔다.


 집에 오니 아빠가 노트북을 보며 집중하고 있었다. 간만에 설거지 외에 다른 것에 집중하는 아빠를 본 것이다. 가만 보니 자소서를 쓰고 있었다. 연금도 고정적으로 잘 나오면서 갑자기 웬 자소서냐고 물었다. 그냥 코로나도 돌고 적적하니가 밖에 나가볼까 했는데 헤드헌터에게 메일이 왔단다. '자소서가 없는 시대에 입사해 내 나이보다 오랜 경력을 보유한 아빠에게 자소서라니 헤드헌터가 양심이 없네.'라고 말하자, 아빠가 자소서를 첨삭해달라고 했다. 귀찮았다. 저녁에 봐준다고 아빠의 방문을 닫았다. 닫히는 방문 사이로 휑한 뒤통수와 노안으로 콧잔등에 어정뜨게 걸친 돋보기안경과 난닝구 차림의 콜라보까지. 자소서에 골몰하는 영감님을 보고 있자니, 노년에 철물점을 하고 싶다는 아빠의 소망이 생각났다. 저렇게 성실한 공돌이는 심심해서 일 나갈 궁리를 하는구나.


 내 방이 아닌 언니 방으로 들어왔다. 언니 방에는 가로 세로 2m 너비로 정사각형의 꽤 큰 창문이 있다. (그래서 방을 뺏겼다.) 그리고 그 창문을 열면 수평선의 시야로 한눈에 가로수 길과 드넓은 하늘을 담을 수 있다. 우리 집은 9층으로 사람들의 눈치를 보지 않고 아름다운 풍경을 즐기기 딱 좋다. 책상을 끌어다 의자 삼고 눈높이를 맞췄다. 거무죽죽한 방충망도 열어젖히니 시야가 한층 밝아졌다. 창틀에 머리를 기댄 채 무릎 끌어안아 안정감 있는 자세를 취했다. 푸른 하늘 위로 간간히 지나가는 비행기, 엄지만 한 사람들, 알록달록한 우산과 땅을 적시는 여우비까지 모든 게 아름다운 한 폭의 수채화 같았다. 움직이는 그 그림은 한참 보고 있어도 질리지가 않았다. 시간이 얼마나 흘렀는지 몰랐지만 나는 얼추 3시간을 창틀 앞에 앉아있었다.


 우울증과 함께 시간은 속절없이 흐른다. 잠만 자느라 하루가 한 시간처럼 지나버리거나, 공기에 짓눌린 상태로 시계 초침 소리에 시달리며 일 년 같이 아득한 하루를 보내기도 한다. 그 순간 나에게는 3시간이 30분 남짓처럼 느껴졌다. 그만큼 올해 들어 가장 평온한 순간이었다. 그리고 정말 기묘한 생각이 들었다. '하늘로 날아들면 오늘이 어떨까'라는. 바람이 너무 따뜻하고 시원하게 불어서 점점 바깥공기에 더 가까워지고 싶었다. 고통스럽거나 불안함 혹은 죽고 싶다는 생각과는 전혀 다른 진정으로 평온한 감정이었다. 빗방울이 살짝 얼굴을 적시기에 손을 더 내밀었다. 빗방울이 손등을 타고 또르르 흘렀다. 너무 예뻐서 기분이 더 좋아졌다. 


 다리도 내밀었다. 다리에도 빗방울이 흘러서 시원했다. 그렇게 조금씩 조금씩 몸을 창 밖으로 내밀었다. 정말 죽고 싶다는 생각을 한 게 아니었다. 너무 평온해 죽음이나 위험에 대한 경각심이 전혀 없는 기분에 가까웠다. 마치 판타지 속 인물이 된 것 같이 이질적인 지금, 여기서 떨어져도 다시 살아나 게임이 진행될 것 같은 느낌이었다. 평상시엔 내려다보지도 못했던 9층의 높이가 하나도 무섭지 않았다. 그냥 2층 정도로 낮게 느껴졌다. 점프하면 닿을 것 같은 거리감 정도. 그렇게 팔과 다리를 흔들거리며 평온함을 즐기고 있었다. 


 비가 오는 탓에 거리에는 사람도 없었고, 모두 우산을 쓴 탓에 아무도 하늘을 올려다보지 않았다. 비가 오는 창문을 굳이 열어 옆 동 아파트 창문을 주의 깊게 살피는 주민이 있을 리도 없었다. 9층 창문에서 그런 미친 짓을 하고 있어도 말리는 사람이 아무도 없었다. 3시간 동안 나는 조금씩 그 높이에 익숙해지며 무게중심을 앞으로 옮겨가고 있었다. 인생의 중심을 잃는 건 그렇게 한 순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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