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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가온미라클 Mar 31. 2023

월요일의 불편한 동행

나이는 숫자가 아니라 진짜다.


  2023년 2월 27일 아침 7시 40분....

  전 지금 눈을 돌리면 멋진 파도가 출렁이는 제주도에 있습니다. 지난 금요일에 내려왔으니 벌써 세 번째 맞는 아침이네요. 작년 연말 제주도로 발령이 난 남편 덕분에 2주에 한 번씩 금요일에 왔다 월요일에 올라가는 제주살이를 하고 있는 중입니다.

 

  오늘 아침은 그동안 ESG 인플루언서란 시험 준비로 포기했던 아침 바다를 여유 있게 즐기며 커피를 한잔 하는 게 목표예요. 뻐근해진 삭신도 달래고, 여행자의 호사도 누려보고 싶었거든요. 그래서, 출근하는 남편 붙잡고 바다의 방향을 물어봤어요. 아쉽게도 북쪽이라고 하네요. 일출은 포기하고 멋진 바다만 즐겨야겠습니다. 설레는 맘으로 테이블과 의자를 배치하고 커피 한 잔을 진하게 탔어요. 


  커피의 진한 향과 함께 ‘파도멍’을 하고 있는데 동트는 하늘빛이 희미하게 느껴지네요. 그 빛을 찾아 부지런히 베란다로 나갔어요. 세상에나~~ 저 멀리에서 해가 뜨고 있네요. 전신주 위에 걸친 일출이 어찌나 황홀하게 느껴지던지, 부랴부랴 핸드폰을 들고 멋진 사진작가의 꿈을 꾸었습니다. 하지만, 밑에서 몽글몽글 피어오르는 보일러 연기와 시답잖은 실력 덕에 저만 만족한 사진을 찍었습니다.

 

  그것도 잠시 끝없는 답답함이 치고 올라옵니다. 도로를 달려 지나가는 차들의 바쁨 속에 또다시 저의 모습이 비쳤나 봐요. 몸이 기억하고 있는 시간의 움직임과 바빴던 호흡들로 아침마다 이유 있는 불편함과 싸우고 있는 중이거든요. 특히, 월요일 아침은 더 힘이 드는 것 같습니다.

 

  지난 두 달 동안 우울해지지 않고, 누구보다 잘 살고 있다고 소리치고 싶어 하루에 15시간 정도를 공부와 책 읽기, 블로그 쓰기로 보냈습니다. 머리가 생각할 틈을 주지 않고, 몸이 허둥대지 않도록 무진 애를 쓰며 저의 자존심을 지켜보려 한 것이지요. 열심히 일했고, 잘했으니 쉴 자격이 충분하다며 푹 쉬라고들 하지만 그건 저에게 허공의 메아리로 들릴 뿐입니다. 아니, 그 말들이 오히려 저를 더 아프게 합니다.

 

  정말 열심히 일하고, 좋은 실적과 평가로 인정받은 직장 생활의 마무리가 내가 생각한 아름다움이 아니라 쉴 수가 없습니다. 철저하게 내 식구 챙기기와, 지역이기주의라는 것 때문에 난도질당한 마음의 상처가 너무 아프고 쓰라립니다. 그래서 미친 듯이 살았습니다. 더 잘 되고 싶고, 더 잘 살아서 보란 듯이 큰소리치고 싶었거든요. 하지만, 나이와 좁은 지역사회의 장벽에 갇혀 꼼짝할 수가 없습니다.

 

  나이는 숫자에 불과하다고 누가 그랬을까요? 막상 넘어보려 하니 태산처럼 크고 아득한 절벽만 같았습니다. 두세 군데 좋은 자리가 났지만, 모두 나이에 걸려 명함도 내밀어 보지 못했습니다. 그래서, 더 절망하고 더 화가 났습니다. 그걸 아는 가족들은 각자의 방식으로 저를 위로하고 따뜻하게 안아줬습니다. 


  두 달 동안 가족들의 모든 세포가 저에게 집중되어 있는 게 느껴져 씩씩하게 잘 살아내려고 달리고 또 달렸지요. 하지만, 쏟아버리지 않고, 묻어두고, 잊어버리려 애쓰고, 척하며 살다 보니 저 한편에서 잠을 자던 감정들이 한 번씩 피어오릅니다. 오롯이 혼자가 되어 있는 날, 아무것도 하지 않는 시간엔 특히나 더 초대받지 못한 손님처럼 불쑥 찾아와 한바탕씩 휘젓고 가거든요.

 

  오늘 아침도 여유 있는 쉼으로 즐거운 시간을 보내리라 다짐했지만 반갑지 않은 친구가 또 주변을 맴돌고 있습니다. 그 감정에 빠지지 않으려 발버둥 쳐 보지만 어쩔 수 없이 끌려감이 느껴집니다. 생각을 바꾸고, 다른 일들로 분주해 보려 노력해 봐도 한 번 찾아온 이상 쉽게 떠나려 하질 않습니다.

 

  그래도, 이젠 매주 찾아오는 이 감정의 찌꺼기들에 대한 실체를 알고 있어서 다행입니다. 끝없는 나락으로 떨어지지 않고 다시 일어날 수 있도록 응원해 주고 지지해 주는 가족과 이웃들이 있어 너무 감사하고 행복합니다. 한때는 숨고 싶고, 도망가고 싶은 마음에 굴도 많이 판 것 같습니다. 하지만, 이젠 그들과 맞서서 바라볼 수 있고 무시할 수 있는 용기도 조금씩 생기고 있어 다행입니다. 무엇보다 나를 가장 사랑하고 존귀하게 여길 줄 아는 단단한 마음이 있어 다행입니다.

 

  비 온 뒤의 땅이 더 단단하게 굳듯이 그렇게 성장할 것이란 믿음이 있어 정말 다행입니다. 이제 아이들이 있는 서울로 돌아갈 준비를 해야 할 시간입니다. 훌훌 털어버리고 아픔보단 설렘으로 가득한 하루가 되길 기도해 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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