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간이 약이다
'시간이 약이다'라는 말이 있죠?
힘들고 괴로웠던 아픔과 상처들이 시간이 지나면 자연스럽게 잊히기도 하고 치유되기도 하는 걸 두고 하는 말인데요. 그렇게나 아프고 힘들었던 저의 상처와 아픔도 시간의 흐름 덕인지, 저의 몸부림 덕인지 몰라도 이제 어지간히 무뎌졌나 봅니다.
휴가보다 일로 더 많이 온 제주도를 일 없이 오려니 참 아팠더랬습니다. 광주공항 역에서 캐리어를 끌고 걸어가는 길이 특히 힘들었지요. 그런데, 지난 금요일 그 길의 아픔이 사라졌음을 느꼈습니다. 사실, 많은 걱정을 하며 전철에서 내렸거든요. 그런데, 편안한 마음으로 주변 경치와 전시된 사진을 보고 또 다른 여행을 꿈꾸는 저와 만났습니다.
그리고, 오늘 다시 제주를 떠나 집으로 돌아가는 날입니다. 2주 전처럼 아픈 아침이 재현될까 봐 많은 각오를 했습니다. 그런데, 그런 마음이 올라오지 않네요. 그것뿐 아니라, 그동안 상처 입은 곳을 벗어나고픈 마음에 전혀 듣지 않았던 CCM을 저도 모르게 틀었습니다. 모태신앙은 아니지만 어렸을 때부터 함께 한 삶입니다. 그런데, 그 안에서 큰 상처를 입고 나니 더 혼란스럽고 힘들었습니다. 너무 실망해 버릴 수만 있다면 버리고 싶을 정도였는데, 다시 돌아온 저의 모습에 기뻤습니다.
그렇게나 잊으려 발버둥 칠 땐 잊히지 않고 새록새록 떠오르더니, 생각의 문을 닫고 나자 제 것들이 돌아왔습니다. 저의 문들이 하나씩 열리며 제 자리를 찾아감이 느껴집니다. 새로운 꿈을 꾸며, 즐길 줄 아는 아이로 돌아감이 보입니다. 밝음을 사랑하고, 감사할 줄 알기에 더 이상 아파하지 않습니다. 더 단단해지고, 강해졌음이 느껴집니다. 오늘은 어떤 그림들로 신나는 하루를 채워갈지 설레는 긍정의 스위치가 켜졌습니다.
남편이 출근한 후, 키보드를 두드리는 대신 숙소를 말끔하게 청소했어요. 제 감정과 상처에 빠져있느라 보이지 않던 구석구석을 치우며, 제 마음속에 남아있는 찌꺼기도 닦아냈지요. 그동안 놀다만 가라며 아침밥도 차려주고, 청소도 하는 걸 모른척했습니다. 짜여 있는 내 시간을 다 살아내지 않으면 패배자가 될 것만 같은 강박에 여행을 하면서도 계획된 일들을 죽어라 해냈거든요. 그러니, 즐기지도 못하고 피곤에 절어도 편히 쉬질 못했어요. 제 상처와 아픔에만 갇혀 주위를 둘러볼 여유가 없었던 것입니다.
그런데, 오늘 아침 다른 날과 달리 게으름을 피우면서도 마음이 편했습니다. 여행 후유증으로 몸이 말을 듣지 않나 보다 생각했는데 어느 순간 뇌의 회로가 거꾸로 돌고 있는 게 느껴졌어요. '드디어 긴 터널을 빠져나와 방향키가 돌려졌구나!' 하는 생각이 들며 머리가 맑아졌습니다. 어제와 다른 오늘을 생각해도 더 이상 불안하지 않았고요.
얼마 전부터 찾아온 빛의 줄기입니다. 긴가민가 확신이 없었는데, 오늘 그 문을 활짝 열고 들어가게 된 것입니다. 그 감정이 진짜인지 확인해 보고 싶어 커피 한 잔을 들고 베란다로 나갔습니다. 출근하는 차들보다 저 멀리에서 파도치는 바다에 마음이 가닿는 것을 보니 진짜로 힘든 계절이 지나갔나 봅니다.
이젠, 씨를 뿌리기 위해 밭을 갈고 거름을 주는 농부들처럼 저도 저의 봄맞이 준비를 해야겠어요. 불안의 시간에 쫓겨 빽빽하게 채워놨던 것들을 모두 거둬내고 갈아엎어야겠습니다. 새로운 희망의 씨를 뿌리고, '생각의 밭'으로 일궈야겠어요.
그동안 강박적으로 살았던 시간에서 벗어나 발길과 마음이 닿는 곳에 머물러 봐야겠습니다. 이 '사유의 여행' 끝에서 만날 저란 아이는 어떤 모습일지 기대하며 즐겨보렵니다. 새로운 도전과 낯섬을 두려워하기보단 호기심을 갖고 즐길 줄 아는 아이와 만나면 좋겠다는 바람도 살짝 가져봅니다.
하지만, 그마저도 욕심이겠지요? 아무 생각 없이 훌훌 떠나 생각의 가지가 닿는 곳을 맘껏 즐기다 보면 살며시 내리쬐는 봄볕을 만날 거라 믿어요. 그게 진짜 저이고 진정한 자유가 아닐까 합니다. 그 바람의 숨결을 만나러 이제 출발합니다.
렛츠 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