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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가온슬기 Sep 07. 2024

피아노를 치면

지희, 피아노를 치다


내가 들어온 이래 그 음악은 한 번도 똑같은 적이 없었어요. 절대로 똑같지 않아요. 매일매일 그것은 무언가 더 새롭고 멋지고 믿을 수 없는 것입니다. 그것이 바흐입니다. ”

(첼리스트 카잘스 , 나의 기쁨과 슬픔 중)




선생님은 초록색 책을 펼친다.

손가락에 번호가 있고

그 번호대로 음을 누르고

손가락에 힘을 연습하는 이 시간.


누구도 만들어준 규칙이 없는

시장 골목 아이인 지희의 일상에 규칙이 생긴다.


아침에는 집앞에 던져진 아빠의 신문이

세상과 지희를 연결해주고

낮에는 학교가 있지만

피아노 학원에 가면  규칙적인 연습으로

세상을 만난다.


아무런 규율과 규칙도, 기대도 없는

지희의 삶에 조금씩 질서가 생겨난다.


노는 일상의 틈, 지희의 시간 중간에

허리띠같이 차지하게 된 작은 변화


포르테, 포르티 시모

새로운 단어들을 배워가면서

알지 못하는 세상이 있다는 걸 배운다.


크레센도, 데 크레센도..

점점 크게, 점점 작게


피아노를 치고 있으면 다른 세상이 된다.

더이상 이곳은 신기촌 시장이 아닌 다른 세상.

피아노와 지희, 그리고 소리.


지희는 표현할 수 없지만 피아노를 치면 칠수록 마음 속 자신이 다른 사람이 되는 것만 같다. 시장 사람이 아닌 것만 같다. 엄마 딸이고 시장 아이인 건 맞는데 피아노를 치면 칠수록 지희의 마음 속 아이는 다른 얼굴의 아이가 된다.


시장 속 이 피아노 학원은

다른 세계로 들어가는 문.

교양이 있는 곳으로 들어가는 세계


바흐가 존재하고 부르크뮐러가 있는,

명곡들과 역사가 있는 음악의 세계에

접붙여지는 듯한 느낌


늘 시장 속에서 이리저리 떠다니는 느낌이 드는

지희가 세상에

뿌리내려도 될 것 같은 느낌


누가 글자를 알려주지 않았는데도

혼자서 엄마 미용실의 잡지를 읽고

유치원 선생님을 놀래킬 때도

뭔가 자기 안에 힘이 있는 것 같이 느껴졌었다.


그 때처럼 피아노를 계속 치고 조금 더 어려운 곡,

또 조금 더 어려운 곡을 쳐낼때마다

마음 속에서 힘이 생기는 것을 느낀다.


고모가 집에 올 때마다 깜짝 놀라고

오늘도 어김없이 군대처럼 줄을 세우고

키를 재고 잔소리를 들어도


엄마의 웃음기 없는 얼굴을 보면서

마음에 힘이 없을 때에도

친구를 집에 데려오지는 못해도 그래도


지희 자신의 마음이 조금씩 아주 조금씩은

힘이 생겨나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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